한국지사 설립
싱가포르에서 해외생활을 즐기던 어느날 한국에 지사(Branch Office)를 설립할 예정이며 나는 그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은 중요한 시장이기 때문에 사무실을 열어 고객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취지였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지만 외국에 살아보고자 유학까지 포기하고 이직한 나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싱가포르의 아쉬운 점 편에서 언급하였지만 이 회사를 계속 다니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1년 동안의 싱가포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한국에서 영업을 담당할 분을 고용하였고 그분과 나 두명이서 한국지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나의 첫 회사는 임직원 수가 4만 명에 달하는 '대기업'이었는데 이제 직원이 두 명 뿐인 '초소형 법인'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직 사무실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사무실 임대 계약이나 법인등록 업무는 본사에서 직접 진행하였으나, 기타 여러 잡일은 직접 처리해야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에서는 총무팀이 사무실 운영을 관리해주겠지만, 단 두 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에 총무팀이 있을 리가 없다.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 현황을 점검했고 전화, 인터넷, 보안시스템 등을 설치했다. 덴마크 본사에서 직접 지급받은 노트북을 제외한 모니터, 마우스, 프린터 등의 전산장비라든지 물, 휴지 등의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회사를 직접 만들어 나가는 흥미로운 경험으로 여겼지만, 간혹 '내가 이런 업무까지 해야해?' 라는 마인드를 가진 분이라면 큰 규모의 회사가 어울릴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는 각각의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으며 업무 매뉴얼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전문적인 툴(소프트웨어 혹은 방법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일한다면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은 경향이 있다. 업무별 전문성은 다소 떨어질 수도 있지만, 다양한 업무를 직접 경험할 기회가 많다. 직접적인 경험(Direct Experience)이 가장 효과적인 학습(Learning) 방법임을 고려하면 본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엔지니어가 하는 일 - 기술지원 편에서 언급했듯이 제조기업의 핵심 기능은 연구개발, 생산, 판매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조직에서 수 많은 엔지니어가 기술 관련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 내가 속한 한국지사는 '판매'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곳의 기술지원 엔지니어가 커버해야 하는 분야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국내 고객 입장에서는 한국지사가 유일한 접점이었고, 지사의 엔지니어였던 나는 기술 관련 모든 이슈에 대응해야 했다. 기술교육 제공이나 서비스 케이스 처리와 같은 기술지원 기본업무 뿐만 아니라, 개발자의 시각에서 제품의 설계 및 동작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품질 이슈에 대해 문제 원인과 조치 방안을 제공해야 했다. 더 나아가 안전인증 등 현지 규제와 관련된 부분도 이해하고 인증서 발급 등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그야말로 '일당백'이 되어야 했다. 물론 본사 담당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업무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심지어 기술과 무관한 분야에 대해서도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 판매조직에 있다 보니 매출이나 가격방침 등 영업적인 내용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고객사와 미팅을 진행하면서 영업 담당자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배우는 것도 많았다. 또한, 전시회나 로드쇼 등의 마케팅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브로셔나 언론보도자료 등을 검토하면서 마케팅 업무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직 구성원의 성향(특히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회사의 인원이 적으면 유연한(Flexible) 업무조건을 구성하기 쉽다. 여기서, '유연한 업무조건'이 가능하려면 '어떤 직원의 특수한 상황을 수용'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저해하는 주된 요인은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일 것이다. 다른 직원 수가 적은 소규모 회사는 아무래도 유연하기 쉽다. 가장 중요한 '급여'를 생각해보자. 작은 회사에서 소수의 중요 인재를 고용한다면 높은 액수의 급여를 책정할 수도 있고 눈부신 성과를 올리는 직원에게 거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대기업 공채 사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경우 정해진 연봉 테이블을 벗어나기 어렵다. 다음으로 업무시간을 생각해보자. 일부 대기업에서는 유연근무제를 적용하여 주40시간을 채운다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이끌어가는 회사도 있지만 대다수의 회사에서는 정시출근을 지키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정시퇴근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는 회사 정문에서 지각자를 체크하기도 했다. (물론 회사가 퇴근시간을 엄격히 체크하진 않더라) 반면에 작은 회사에서는 상황에 따라 출퇴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사정이 있으면 조금 늦게 오거나 조금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작은 회사에서는 직함(Job Title) 또한 선택의 폭이 넓을 수 있다. 내 공식 영문 직함은 Technical Support Engineer였는데, 한국어 직함이 없다보니 주변에서 불편해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외국인 직장 상사는 나의 한국어 직함에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터라 내 마음대로 고르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해서, 한국지사 설립 후 나는 '팀장'이 되었다. (팀원이 나 혼자인 것은 함정)
대기업과 다른 소기업의 특징
- 다양한 업무
- 유연한(Flexible) 업무조건
대기업은 장점이 명확하다. 일단 근본(혹은 체계)있는 경우가 많고, 급여 수준이 높은 편이다. 안정적인 것도 큰 장점이다. 특수한 위기상황을 제외하면 임금체불의 위험이 낮고, 특히 한국의 대기업은 어지간해서 하루 아침에 해고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분명 장점이 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능동적으로 커리어를 개발할 수 있다. 대기업과 소기업 각각의 특징을 파악하고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곳을 선택하자. 개인적으로는 양쪽 다 좋다. 가능하다면 둘 다 경험해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