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대 걸음을 걷다 83,989보
9. 9일째 – 43번 절 메이세키지 가는 길, 83,989 걸음
1월 17일(목)
4:00 잠에서 일찍 깼다. 오늘 갈 길이 멀다.
6:00 오다 대사당 출발, 어젯밤부터 참았던 소변을 보는데 시원하다.
뒷간이 숙소밖에 있어서 한밤중에 나가기가 거북했던 것.
대사당에서 잠자기는 처음인지라 다소 긴장한 건 사실이다.
어쨌거나 잘 쉬고 숙소를 나선다.
캄캄해서 주변이 보이질 않았는데 나중에 이곳에 머물렀던 순례객이 알려주었는데 주변이 마을 공동납골묘지가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털끝이 서는 느낌이다.
열쇠를 반납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아직 마을이 잠들어 있는 시각이다.
6시 이곳 마을에선
시보를 알리는 음악이 '애덜바이스'다.
일본 마을에서는 대부분 매시각마다 마을 스피커로 시보음악을 틀어주는 것같다.
새벽 공기가 찬데 옷을 세 겹 입으니 좀 낫다.
7시 정도 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다 천과 그 주변 경관이 좋다.
이 계곡물도 우치코를 향하여 가겠지. 편안히 유영하는 비단잉어도 보이고.
저 물이 먼저 도착할른지 내가 먼저 갈지.
가다가 쉬어가기도 하겠거니.
이 길이 걷기 딱 좋다.
드라이브로 지나가기엔 너무 아쉬운 곳,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기분좋게 걸음을 옮긴다.
7:20 우메지 정류장, 소학교 학생 2명이 버스를 기다리기에 말을 건네 봤더니
4,6학년이란다. 노란색 학교모자가 귀엽다.
43번 절 메이세키지까지 47키로 남았다.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가보자.
텐트를 짊어진 프랑스 젊은이를 만났다.
노숙 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다닌다.
내 배낭이 10키로 되는데 이 친구는 대략 17,8키로는 족히 될 거같다.
대단하다
도로로 다니니 덥다고 하는데, 좀 있으면 산길에 눈도 맞을 거라 했더니 몸서리를 친다.
10:00 무료 숙소(도로변 휴게소) 착. 나가오카 터널 직전에 있다.
어제 여차하면 여기까지 와서 머물 생각이었다.
오다에서 4시간 거리이고, 다리 아픈 걸 감안할 때 5시간은 빡빡하게 걸렸겠다.
그럼 밤 12시 도착.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11:30 우치코좌 착
12:30 편의점에서 점심.
따끈한 국물이 있는 컵라면에 어제 받은 언 주먹밥을 넣어 먹는다.
새벽에 주먹밥 1개 반을 먹었는데 반 개짜린 방안이 추워 언 듯해서 남긴 건데, 라면 국물에 넣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국물을 싹 다 비웠다.
편의점 부부가 친절하시다. 아주머니께서 컵라면에 물과 스프를 직접 넣어주시고 뚜껑을 테이프로 붙여주시기까지, 아저씨께는 물 부탁을 했더니 받아주면서 물기까지 닦아주시네. 야마자키 편의점.
벤치에 앉아 조금더 쉰다.
바람이 차지만 밝은 햇살이 가끔씩 비춰주니 따사롭다.
오다에서 우치코까지 380번 도로가 나를 안내해주었고, 지금부터 43번 절 메이세키지까지는 56번 도로를 이용한다.
토요가하시 직전의 길에서는 졸면서 걸었다. 긴 둑방길. 맞바람이 불어 걷기 불편했지만 그런 대로 좋다.
14:30 토요가하시 착
앞으로 남은 길과 시간. 오후 8시가 넘어 도착하겠군.
오즈와 우외지마를 나누는 경계를 오르는 길.
무척 길다. 가는 길에 휴게소 음식점도 문을 닫았다. 다코야끼가 먹고 싶었는데.
오전에 걸었던 오다천변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산길에서는 발바닥이 아프지 이런 도로에선 가끔씩 잔돌도 신발 안으로 들어오고, 발가락도 짓물러 쉬었다가 가려면 여간 아프지 않은 게 아니다.
터널 1.2키로. 대단히 위험한 터널을 지나간다.
시코쿠 순례에서 가끔씩 만나는 터널인데 유독 여기가 지독하다. 마스크는 필히 착용해야 한다. 내가 지나온 터널 중 나카무라에서 38번 절 갈 때의 터널 길이가 1.6키로였는데, 그래도 거긴 인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뛰어가기도 했었는데, 여기선 가장자리벽에 바짝 붙어서 걸어가도 위험했다. 그나마 대형차량도 약간은 속도를 줄여서 조금 옆으로 비켜 운전해주어 고맙긴 한데 그래도 차량소음으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내가 외우는 주기도문을 계속 웅얼거리며 간다.
터널을 나온 후부터는 내리막길이라 좋다.
밤길이라 지도에 나와 있는 산길로 들어서진 못하고 계속 56번도로다.
일본 도로의 합리성은 인도를 한쪽에만 마련하여 차도를 넓힌 점일 것이다.
7시가 되고...8시가 되도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중에 걸으면서 주변 사물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인지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이제 내일모레면 인생 후반기에 접어드는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잠깐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진실된 삶,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솔직한 내 모습을 보이자.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자. 그리고 배려의 삶, 봉사의 삶, 공감하는 삶을 살아보자.
민가 굴뚝에서 나는 연기,
나무 타는 냄새와 구수한 밥냄새가 후각과 위를 자극한다.
제일 좋아하는 내음이다.
밤이 들어설 때면 어김없는 고향의 냄새다.
오늘 처음으로 납경료를 지불하지 못한 날이다.
마츠치야 숙소는 만실이라 예약할 수 없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비도 내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마츠야료칸에 자리가 있어 예약.(석식은 안 되고 조식포함 5,725엔)
숙소 도착전 코스모스 대형슈퍼에서 장 좀 보고 떨어진 간식도 구매한 뒤,
음식점에서 식사도 하고 숙소에 도착. 21:00
극기, 내가 걸을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본 날이다.
앞으론 두번 다시 이런 걸음은 걸을 수 없을 것이며, 내 생애 하루걸이 최대의 걸음수일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내 몰골.
* 숙소 추천할 만하다. 세탁도 직접 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아침 식사도 좋다.
젊은 부부가 일하는데, 물려받아 일하는건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대단히 친절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