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은 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한다고.
향기가 없어 벌들도 거의 찾지 않는 그 꽃을 오로지 사람이 보고 즐거워하라고 만드신 것 같다고.
물론 이 말은 틀린 말이다. 벚꽃은 향이 있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서 맡아야 겨우 희미하게 향이 나기 때문에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 가도 향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벚꽃에도 꿀이 있기 때문에 벌들이 찾아온다.
나는 꽤나 감상적인 그분의 표현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다. 나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동식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아담에게 '다스리라'는 책임을 부여하셨지, '너를 위해 지었노라'라고 하진 않으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세입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저 계절에 따라 피고 지고, 한데 어우러져 사람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풍경을 완성하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그 존재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디자인과, 그 섬세함과 완벽함에 감탄할 뿐이다.
2022년 4월, 봄기운을 느끼면서 튤립 한 송이를 사다가 화병에 꽂아두고, 서서히 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생명의 기운이 생생하게 머물러 있는 기간은 짧았다. 지는 꽃잎에도 연약하지만 아름다움이 머물러 있었다. 어쩐지 화병에 꽂기 위해 사는 꽃들은 금세 지고 말아 끝내 느낄 수밖에 없는 속상함이 싫어 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신 오렌지 쟈스민을 반려식물로 들여놓고 자주 들여다보며 새로 싹이 움트고 자라는 모습을 통해 역동적인 생명을 기운을 느끼고 있다.
작은 곤충마다 지닌 고유한 형태, 기린과 얼룩말의 무늬, 각양각색이면서도 규칙적인 꽃잎과 그 무늬의 패턴 등을 바라볼 때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 설계'를 해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고자 하시지 않은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이렇게 생기는 건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게 느껴질 만큼 세상만물은 섬세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벚꽃나무 또한 우리의 존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디자인 목적에 맞게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창초의 기쁨으로 만드셨고 그 창조물 중 하나가 인간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성과 디자인에 담긴 의도를 발견하고, 깨닫고 감탄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들을 우리는 매번 다른 순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하고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출근길 보도블록 바닥 안쪽 코너에 혼자 오동통하게 활짝 피어 있는 민들레를 지나치지 않고 몇 초간 바라보다가 지나간 적이 있다. 꽃이라는 건 대부분 하늘로 고객을 들도록 되어 있으니까, 혼자 너무 활짝 피어 있는데 바닥에서 고개를 들고 '나 좀 봐줄래?'하고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왠지 내가 다 속상할 기분이 들었달까.
또 어느 날은 나무의 나이테를 묵상했다. 도대체 나무는 왜 나이테를 가지게 되는 구조로 자라나게 만들어진 걸까. 나무에게도 특별히 기억되는 나이의 모습이 있을까. 그때의 모습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마치 나무가 겹겹이 나이테의 옷을 입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세월의 옷을 입으면서 변해왔다. 하지만 과거의 옷이 사라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 기록으로 남아 있고, 나의 일부로 같이 존재한다.
자연 속에는 인생의 모습을 깨닫고, 주어진 삶을 겸허히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앞만 보고 회사로, 집으로 정신없이 돌진하는 걸음이 아니라, 걷는 동안에도 주변에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동네 안에서라도 잠깐이나마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