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전업주부가 될 줄 몰랐어
직업은 엄마입니다.
대학생 때 꿈은 커리어우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손에 커피를, 다른 손에 서류를 들고 다니는 바쁜 직장인. 하이힐에 정장을 입고 다니며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갖춘 능력 있는 여성. 실제 졸업 후 홍보대행사에 취직한 나는 얼추 비슷한 차림새로 여의도, 시청, 강남 등 핵심 업무 지를 휘젓고 다니며 원하는 바를 이뤘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고급 식당엘 다녔다. 일은 힘들었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함께 상승했고, 월급도 조금씩 늘어났다. 아침엔 늘 스타벅스에 들렀고 맛있고 좋은 것을 먹는데 아끼지 않았다.
"먹는 거 아끼지 마 엄마. 돈 벌어 어디다 쓰게?"
지하철에서 목마르다며 생수를 사 먹자 엄마는 돈 아깝게 물을 사 마신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런 엄마에게 당당히 먹고 싶은 거 살 돈 충분히 있으니까 엄마도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며 말대꾸를 했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첫 임신은 유산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나는 회사부터 그만뒀다. 심한 스트레스와 과도한 업무가 문제이지 않을까 했다. 그때는 유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기를 낳기에 이미 적지 않은 나이라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회사를 그만두고 마음을 편하게 먹은 탓에 금세 예쁜 아기가 다시 우리에게 왔고 나는 임신과 출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퇴사를 할 때쯤 지독한 번 아웃을 겪고 있었다. 일은 지루했고, 사람들도 지겨웠다. 그때 베이킹에 빠지며 작은 디저트 가게를 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퇴근 후 제빵 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땄고, 집에 오븐이며 반죽기 등 갖은 장비를 구비해 나만의 레시피 만들기에 몰두했다. 출산 전 뱃속의 아기와 함께 스콘과 쿠키를 구우며 출산하면 꼭 가게를 열어야지 생각했다. 그럴만했던 것이 시어머니가 아기를 봐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아기는 내가 보고 있으며 디저트 가게의 꿈은 잠시 미루게 된 상황이다. 이런저런 사정 상 시어머니는 아기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고, 아기 엄마인 나는 집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전업주부가 된 이유다. 돌쟁이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지 않았고, 옆에 끼며 하루 종일 엄마의 사랑을 주고 싶단 욕심도 있었다. 육아와 가게를 병행할 자신은 없었기에 잠시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전업주부가 되고 나니 요즘 자존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경제력과 소속감은 생각보다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나의 엄마처럼 요즘은 나도 밖에서 물을 사 마시지 않는다. 커피도 특별한 이유 없이 마시지 않게 됐다. 갖고 싶은 것은 오래 고민하고 구매한다. 바람 좋은 날, 커피를 사 먹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일을 그만두지 말걸 그랬나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 잔고는 사라지지만 채워질 일은 없다. 동시에 자신감 넘치던 과거의 나는 점차 사라져 버렸다. 밤이 되어 아기가 잠들면 무능력한 내 모습에 자주 우울함이 밀려오곤 했다.
"좋겠다. 나도 일 안 하고 남편이 주는 것만 받고 싶다"
가끔 듣는 말이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기에게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놀아주고 재우면 끝나버리는 하루의 루틴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나이를 먹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불안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하지만 돈 버는 것 만이 쓸모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육아를 하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이다. 그러니 좀 더 자랑스럽게 엄마라는 직업을 생각하고 싶다.
여전히 아기가 조금 크면 가게를 열고 싶고, 글도 계속 쓰고 싶다. 당연히 건강하고 예쁘게 아기도 키워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