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반이었더라?” 보통 아빠들처럼 아이의 학교생활에 무관심했다. 아이가 몇 반 몇 번인지 몰랐고, 가끔 궁금해서 물어볼 때면 머쓱해할 뿐이었다. 아이 성적에 3가지 법칙이 있다고 했던가? 외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살짝 열성(?)적인 와이프와 몇 번의 충돌이 있은 후 아이 교육에 관심을 껐다. 와이프가 강조했던 3가지 법칙을 명분 삼아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만큼은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나름의 핑계를 찾았다.
코로나19는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도 혼돈을 몰고 왔다. 한참 뛰어놀며 에너지를 발산할 시기였던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지 못하고, 더 이상 뛰어놀지 못하게 되자 답답해했다. 그마저도 학교를 못 가는 날이 이어지고, 그런 와중에 놀랍게도 학원은 계속 다니게 됐다. 숙제와 공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은 꽁꽁 묶인 채, 마냥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무척 괴로웠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마다 아이와 와이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고부갈등에 낀 남편처럼 나는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 편에 서는 것이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줄까? 보다 어느 쪽에 줄을 서는 것이 내가 좀 편안한 저녁을 보낼 수 있을까?를 궁리했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나는 양쪽에 낀 샌드백처럼, 걸핏하면 얻어터지는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앞으로 고등 졸업까지 적어도 6년의 시간이 더 남아있는 사실에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저녁 시간은 살짝 열성적인 홍코너 측 엄마와 만만찮은 말꼬리 잡기 대가인 청코너 측 아들의 팽팽한 기싸움이 연일 생중계되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는 끝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양 선수는 물오른 경기력(?)을 선보였다. 우열을 가리지 못하는 경기가 반복되자 홍코너 측 엄마가 어느 날 칼을 빼들었다. 그 칼은 뜻밖에도 나를 겨누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 교육 문제로 이야기 좀 하자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와이프는 중학교를 대안학교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물끄러미 그러나 동의하라는 무언의 눈빛은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질문을 가장한 통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평소 유별난 사람들이나 대안학교를 보낸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안학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멀리 지방에 있어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라는 정도? 그래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 나는 중학교 때부터 아이를 기숙사에 보내고 싶지 않고, 좀 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와이프는 짧게 ‘도시형 대안학교도 있다’고 했다. 1차 반격 실패.
대안학교는 부모들이 좀 극성이지 않냐고 반문했다. 내심 이건 좀 반박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들어와라. 어디 한번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와이프는 온라인 입학설명회가 있으니, 한번 드러나 보자고 했다. 2차 반격 실패. 어이없게 그리고 너무도 쉽게 2차 반격도 제압당했다. 노련한 와이프는 낌새를 알아채고 결코 링에 오르지 않았다. 한번 드러나 보자는데 마땅히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대안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얇디얇은 내 귀가 바람개비처럼 팔랑거렸다. 특히 프로젝트 수업이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스스로 기획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나는 직업병적으로 ‘자기 의도’를 좋아한다. 자기가 의도를 가지고 스스로 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 결과물은 진짜 자기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이에게도 평소 이런 개념을 가끔 이야기해 주곤 했었다. 대안학교의 프로젝트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이도 흥미로워했다. 자기가 원하는 수업을 열고, 스스로 만들고 해 볼 수 있다는 말에 “호~!”로 답했다.
몇 곳의 대안학교를 알아보고 삼각산재미난학교 입학설명회에 참석했다. 와이프는 입학설명회에 공감이 많이 갔다고 했다. ‘따뜻한 배움 자유로운 돌봄’이라는 학교 철학이 좋았다고 했다. “그럼 학교가 당연히 따뜻한 배움을 한다고 하지, 차가운 배움을 한다는 학교가 어딨어?”라며 비아냥대는 내게 와이프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았다. 사실 이곳은 집에서 너무나 멀었다. 입학한다면 이사를 와야만 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만 벌써 12년째 살고 있으며, 처가댁도 바로 옆에 함께 살고 있다. 지방이 고향인 내게는 이 동네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입학을 하게 된다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썩 기분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점은 와이프도 약간 걸려 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죽고 못 사는 외할머니랑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은 아이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재미난학교는 입학 면접 전 학교 겪어보기를 한다. 일종의 체험수업인데, 3일 동안 재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한다. 와이프가 이틀, 내가 하루를 번갈아가며 아이를 등하교시켰다. 아이가 이틀째 겪어보기를 하고, 집으로 데려가던 날 나는 결심했다. 반드시 이 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고. 아이는 학교가 너무 좋다고 했다. 스트레스도 없고 몸도 마음도 즐겁다는 것이다. 표정이 활짝 웃고 있었다. 와이프도 이날 나와 같은 결심을 했다. 겪어보기 3일째 마지막 날에 아이는 면접을 본다. 우리는 모여 앉아 내일 있을 면접 질문을 연습했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부동산을 방문했다. 아직 학부모 면접도 보지 않았으나, 나는 이미 학부모였다.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와이프에게 학교에 드러눕겠다고 했더니, 내가 더 걱정이라며 면접 준비나 잘하라고 한숨을 쉬었다. 면접에서 어필할 거리를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무난 무난한 사람처럼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지원서와 부모 소개란에는 진정성을 담아 썼다. 와이프와 같이 리뷰도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던 이사 문제는 기적의 논리를 만들어 셀프 극복했다. 12년 동안 한 곳에서 머물렀으니, 한 번쯤 환경을 바꿀 때도 되었다고. 이 기회에 삶의 태도도 한번 바꿔보자고 마음먹었다! 재빠른 태세 전환에 와이프는 박쥐 같다며 놀려댔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디팩초프라라는 사람이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라는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만난 것도 재미난학교에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우리는 모두 기적 속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