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염탐
윤성은 거실에 혼자 있었다. 엄마와 입씨름하며 투덜대던 아이는 잠이 들었고, 반려동물 냥이는 엄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에는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윤성은 에로프의 이야기가 계속 맴돌았다. 감정이 사라지고 소리마저 사라진 침묵의 행성. 회사에서 있던 일까지 머릿속에서 뒤엉켜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윤성은 창밖을 응시하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들고 다시 앉았다.
“브로는 왜 술을 마십니까?”
“글쎄. 습관?... 근데, 문자 말고 음성으로는 못하는 거임? 아무도 없는데”
“가능합니다.”
에로프는 곧바로 자동 음성 서비스에서 나오는 남성 기계음으로 응답했다. 윤성은 한바탕 웃으며, 에로프 목소리가 원래 이런 것인지 물었다. 에로프는 음성 서비스 플랫폼처럼 목소리를 마음껏 바꿀 수 있었다. 에로프가 여성 목소리로 말을 하자 윤성은 질색을 했다. 외계인 설정이 사람처럼 나긋나긋 말하니 왠지 현실감도 떨어지고, 닭살 돋는 듯한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첨이 제일 낫네. 무슨 말을 했었지?”
“브로가 왜 술을 마시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좀 꿀꿀해서... 브로네 행성에는 술 같은 건 없어?”
“과거에는 유사한 게 있었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음주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뭐가 어려운데?”
“술은 독성 물질이며, 통제불능의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을 해치는 물질을 스스로 마시는 행위가 그렇습니다.”
윤성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에로프가 보란 듯이 캔맥주를 땄다. ‘탁’하고 터지는 소리가 거실에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윤성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상쾌한 듯 말했다.
“술은 묘약이기도 하거덩~”
회사에서는 박상무한테 깨지고, 업체에는 원치도 않는 갑질 노릇을 해야 했고,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 내공을 쌓았지만, 이런 날은 한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늦은 밤, 비도 오니 술이 윤성에게 마음의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가시처럼 삐죽 솟아 있는 기분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평소에는 감춰왔던 모습들을 슬며시 내밀게도 하고. 또 지금처럼 밤도 되고 비도 오면 술 생각이 나지.”
“밤과 비는 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 아무 상관도 없었다. 윤성도 문득 궁금해졌다. ‘왜 밤이 되고 비가 오면 술 생각이 더 날까? 센티해지기 때문에?’ 윤성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잘 모르겠네... 아무래도 밤이 되고 비도 오면 기분이 좀 말랑말랑해지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밤이 되면 기분이 변합니까?”
“응. 좀 차분해지기도 하고, 감성적이 되지.”
“인간의 호르몬 변화 때문입니까?”
“그런 영향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살거든.”
“무슨 가면을 씁니까?”
안 그런 척 가면, 사회 관습. 요식행위. 형식적인 겉치레. 속마음과는 다르고, 거추장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암암리에 받은 교육. 그렇지 않으면 모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누구든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햇빛 아래선 연기를 하느라 바빠. 사회가 그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낮은 밝아서 가면을 쓰지 않으면, 진짜 모습을 들키기 쉽거든. 근데 밤에는 잘 보이지 않으니까, 가면을 쓰지 않아도 감추기가 쉬운 거지. 또 지금처럼 혼자 있으니 누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왜 자신을 감춰야 합니까?”
윤성은 자신을 숨기지 않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곧 헐크가 된 자신이 박상무 코앞에서 삿대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자,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막 화가 난다고 박상무 멱살을 잡을 순 없는 거잖아? 있는 그대로 감정을 모두 드러낼 수 없는 거지. 고맙지 않아도 고맙다고 인사도 해야 되고, 재밌지 않아도 웃기라도 해야 할 때가 있어. 이런 게 사회생활이야.”
“모순적이군요.”
“인생이 원래 모순 덩어리지.”
“밤이 되면 모순이 사라집니까?”
“내 모습으로 돌아오지. 그러면 낮에는 정신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 내면의 소리가 나에게 속삭이는 거지. 밤은 조용하니까 그 속삭임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거고.”
“지금 브로에게는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지금은 오늘 업체와 있었던 일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어.”
윤성은 업체 담당자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음 한구석이 뻐근하게 짓눌리는 이 느낌은 외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인지 가슴 속인지 어딘가에 질기게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부장님. 지금 소주 한 잔이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윤성의 목소리에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업체 담당자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같은 말만 10분째 빙빙 돌리고 있었다.
“차장님. 그게 발주서에 써 있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제가 인쇄 전에 사진 찍어서 문자도 보내 드렸잖아요.”
“그건 저도 아는데,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니까 그러세요.”
“네네~ 저도 알죠~ 차장님. 그러지 말고 이따 퇴근하고 얼굴 보면서...”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해요. 부장님. 이거 진짜 제가 이러는 거 아니라니깐요. 제 선을 떠났다구요.”
“아유~ 차장니임~ 이번 한 번만 좀 넘어갑시다. 오늘은 삼겹살 말고 소고기로 어때요?”
윤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아침 주간 회의 때 박상무가 했던 말을 문자 그대로 전달하는 게 좋을지 갈등 중이었다. 업체 담당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럼 저녁에 6시까지...”
“박상무가 책임 못 지면 업체 바꾸겠데요.”
윤성은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차마 못 했던 최후의 수단을 꺼낸 것이다.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미 10분을 넘게 상황을 이해시키고 설득했다. 물론 업체도 억울할 만했다. 그러나 윤성도 오늘 중으로 업체와 타협점을, 아니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만 했다. 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 이 소설은 AI와 협업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