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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향 Jul 09. 2024

슬기로운 가정보육 생활

큰 아이는 어김없이 수족구 진단을 받았다. 와중에 다행인 건 열이 나지 않고 수포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근래 너무 자주 아픈 두 아이들 덕에 가정보육 늪에 빠진 일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 또한 다행스러움을 비집고 나왔다. 큰 아이의 수족구가 의심스러웠던 지난 주말, 작은 아이도 옮게 되면 또다시 근 2주 동안은 다른 일정을 미뤄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이만하니 다행이고 어차피 흐르는 건 시간이라 슬기롭게 가정보육 생활을 해내고자 다짐했다. 화내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사랑과 따뜻함만을 베푸는 엄마의 모습만 보여주기로.




사실 큰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이제 그리 힘들지 않다. 간혹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리광을 부리며 떼를 쓰고 울다가 “엄마, 안아줘”로 마무리되는 일이 버겁기도 하지만, 혹은 밖에서 조금만 걸어도 안아달라, 업어달라 요구하는 게 지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섯 살 난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쓰지 서른여섯 먹은 내가 그럴 순 없는 노릇이고, 내가 아이 등에 업힐 순 없으니 딸아이 요구를 얼마간 들어주는 수밖에. 그렇게 이틀 동안의 큰 아이 가정보육이 무사히 지나가고 있는 오늘 작은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온 건 오후 세 시경. 미열이 올라 수상하다는 연락이었다. 낮잠을 자고 있는 큰 아이를 방에 두고 나와 얼른 저녁을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면 큰 아이를 깨워 작은 아이를 하원시킨 뒤 병원에 가볼 요량으로 바삐 움직였다. 미열이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언니의 수족구를 고스란히 옮았다면 빠르게 판단해 집에 데리고 있어야 했다.

어제도 병원, 오늘도 병원. 한 달 중 하루 걸러 하루는 병원을 가는 것만 같은데 내가 아이들 병치레에 예민하게 구는 건가, 내일 가도 그만인 것을 너무 서두르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건 또 내일 가나 지금 가나 매한가지란 뜻과 같다.

아이들과 재차 방문한 내게 의사가 오늘은 무슨 일이냐 묻는다. 작은 아이가 열이 나는 듯하단 말에 몸을 살펴보고 입 안을 살펴본 뒤, 목이 조금 빨갛긴 하지만 수족구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며 큰 아이의 병세가 호전되어 확인서를 떼러 올 목요일에 다시 와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애매하다는 말이 작은 아이를 내일은 등원을 시켜도 무방하다는 말로 들리지만 어쩐지 꺼림칙하다.


아파트 단지 안, 우뚝 솟은 살구나무에 아이들 주먹만 한 살구가 주렁주렁 열렸다. 여러 명의 주민이 떨어진 살구를 줍고 있었다. 큰 아이는 살구란 사실을 알고 맛있는 건가 싶어 관심을 갖고 작은 아이는 “계란~ 계란~” 하며 근처를 서성인다. 두 아이를 어여삐 여긴 주민 한 분이 가까운 가지에 매달린 살구 하나를 따 큰 아이 손에 쥐어줬다가 싸우겠구나 싶어 얼른 앞치마 주머니에서 다른 하나를 꺼내 작은 아이에게 쥐어준다. 괜찮다고 마다하는 내게 거리낄 필요 없다는 듯 당신이 몇 동에 사는 누구라고까지 말한다. 고맙게 받아 든다. 덕분에 두 아이의 눈동자가 잘 익은 살구처럼 빛이 난다.

집에 돌아와 손발을 닦이고 작은 상에 둘러앉아 살구 두 알을 자른다. 내가 먼저 먹어보니 껍질이 좀 억센 느낌이다. 큰 아이가 눈치를 채고 껍데기는 안 먹고 싶다고 선수를 친다. 토를 달지 않고 껍질을 깎아준다. 큰 아이는 레몬의 신맛도 좋아하는지라 살구의 새콤한 맛도 야무지게 잘 먹는다. 작은 아이도 의외로 맛있다고 입을 쩍쩍 벌린다. 그릇에 잘라둔 살구가 금세 입 속으로 다 사라진다. 잘 먹는 모습이 하염없이 예쁘다. 살구나무에 앉은 두 마리의 참새 같은 아이들을 바라보다 작은 아이도 내일 데리고 있자 마음먹는다. 집에 오니 열이 나지 않고, 몸에 눈에 띄는 수포랄 것도 없지만, 못내 열이 오르내리는 게 마음에 걸려 등원은 무리이지 싶어 진다. 내일은 얼마 전 시작한 [그림책 놀이상담사 자격 연수] 줌 강의 날이라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게 더욱 부담이지만..,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게 엄마 몫이지 않은가.




엄마는 내일 두 아이를 돌보아야 할 내가 걱정이 되는지 몇 번이고 힘들어서 어떡하냔 말만 반복한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힘들다고 안 할 수 있나, 내 딸들을 내가 돌보지 그럼 어떻게 하냐고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돌려준다. 진심이다. 아직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 뒷전으로 밀려나는 나의 일들이, 모른 체 덮어둘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간이 못내 아쉬워 속상하지만 그래도 엄마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와중에 두 아이가 많이 아프지 않고 컨디션이 좋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삶은 어쩌면 이처럼 힘들고 지난한 와중에 기어이 다행스러운 것들을 가슴에 새기고 견디며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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