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단편동화 부문 선정작
한쪽 엉덩이가 찌그러지고, 배에 청테이프를 붙인 돼지 저금통이 탁자 앞에 두 발로 우뚝 선 채 말했어.
“내가 바로 그 돼지 저금통이다!”
“아, 아니 어떻게 돼지가, 아니, 돼지 저금통이 말을···?”
교장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버벅거렸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돼지 저금통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어.
교장 선생님은 입을 틀어막았지. 딸꾹질이 멈추질 않았거든.
“내 몸에서 돈을 꺼내자고 한 건 노유미였다! 달이는 그냥 도와줬을 뿐이야. 내 친구 괴롭히지 마!”
유미 얼굴이 퍼렇게 질렸어.
옆에 있던 수현이가 울먹이며 말했어.
“돼지 저금통 말이 맞아요···.”
“뭐? 근데 왜 달이가 시킨 거라고 했어!”
수현이 엄마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어.
“유미가··· 안 그럼 나랑 안 놀 거라고··· 아이스크림도 열 개나 사 준다고···.”
“아휴, 노유미 너!”
유미 엄마가 유미 등을 후려쳤어. 유미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 그 와중에도 달이는 돼지 저금통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
애애애앵.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장난감 병정들이 들이닥쳤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어. 곰인형이 그랬거든. 지금까지 병정에게 잡혀간 장난감 중에서 살아 돌아온 장난감은 하나도 없었다고.
금기를 깨고 인간 세상에 끼어든 돼지 저금통은 결국 체포되었고, 교장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억을 지우는 화살에 맞아 모두 기절했어.
그날 밤 나는 곰인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머리띠에서 떨어져 나왔어. 뒷산 바위 굴속에 있는 어둠의 감옥으로 향했지. 달이 대신 돼지 저금통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전하고 싶었어.
“넌 내가 본 돼지 중에 최고였어. 달이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도 너처럼 용감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창 안에 있던 돼지 저금통이 배를 벅벅 긁으며 말했어.
“이 상처 보여? 그 일이 있던 날, 잔뜩 화가 난 유미 엄마가 내 배를 부욱 갈라 돈을 꺼내더군. 그러곤 뭐, 쓰레기통에 처박혔지.”
달이가 쓰레기 더미에서 찾은 보물 중에는 배가 찢어진 돼지 저금통도 있었어. 조심스레 돼지 배에 테이프를 붙여주던 달이의 하얀 손이 생각났어.
“달이가 아니었다면 난 어차피 쓰레기로 태워졌을 거야. 이렇게 죽더라도 후회는 없어.”
“죽긴 누가 죽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달이야!”
어떻게 된 일인지 달이는 기억을 잃지 않았어.
달이가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철창 밑을 파기 시작했어. 땅을 파는 달이의 옆모습이 야무져 보였어.
돼지 저금통이 막 구덩이를 빠져나왔을 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어.
“병정들이 왔나 봐! 이제 어쩌지?”
잔뜩 겁에 질린 나를 보며 달이가 말했어.
“같이 싸워야지.”
“그래. 우린 친구니까!”
돼지 저금통이 호탕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어.
달이는 돼지 저금통과 나를 품에 안은 채 굴 밖으로 달려나갔어. 쿵쿵, 쿵쿵. 달이의 심장 박동이 북소리처럼 내 몸에 울려 퍼졌어. 달이를 향해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난 결심했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플라스틱 딸기가 되기로.
번쩍이는 빛이 온몸을 감쌌어. 달이의 머리띠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어. 밤바람은 부드러웠고, 곁에는 친구들이 있었지. 꽉 찬 보름달처럼 행복했어.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