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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Jun 03. 2022

6월 3일 박범준의 하루

악역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범준은 어린 시절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고 항상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 범준이었다. 안 좋게 말하면 호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줬다. 친절한 범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런 그를 답답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범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범준은 회사에서도 좋은 사람이고 싶어 했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를 바랐고 회사에서도 좋은 직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꿈은 적어도 범준의 직위가 낮았을 때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범준은 친절한 사람이자 일 잘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윗사람들은 군말 없이 맡은 일을 해내는 범준을 칭찬했고 동료들은 화 한번 내지 않고 차분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범준을 좋아했다. 범준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원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범준의 연차가 쌓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범준의 직책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회사에서 범준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달라졌다. 특히 팀장 자리에 올랐을 때 회사는 범준이 착한 역할을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그를 팀장 자리에 올릴 때도 위에서는 유약한 성격의 범준이 일을 잘 맡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워낙 다른 일은 문제없이 하고 있었기에 범준은 팀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범준은 팀장 역할을 힘겨워했다.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서와의 협업을 잘해야 했고 위에서 요구하는 것을 처리해야 했다. 무엇보다 팀원을 잘 관리해야 했다. 처음에 범준은 팀원을 우선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회사에서는 범준을 능력 없는 팀장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범준은 회사의 입장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약간 권위적인 태도를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범준도 처음부터 강압적인 태도만을 보여왔던 것은 아니었다. 범준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 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범준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했다. 실제 그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회사에서의 모습은 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친절하지는 않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범준은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팀의 성과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범준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은 범준이 결국 사회에 찌들어가면서 저렇게 되었다며 이해하려는 입장이었지만 새로 입사한 사람들은 범준은 그저 짜증이 많고 권위적인 상사였다. 

범준은 외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특히 협력 업체와의 관계에서는 흔히 말하는 갑질을 했다, 여전히 예의는 있었으나 묘하게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어투를 썼고 협력 업체들은 그런 범준은 힘겨워했다. 끊임없이 업무적으로 협력 업체에게 압박을 줬고 결국 이는 성과로 이어졌다. 만약 범준이 도를 넘게 난리를 쳐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면 범준의 상사가 나서서 ‘에이 그런 것은 아니고요. 자자 술 먹고 우리 풉시다.’라며 분위기를 푸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한 상사는 뒤로 가서는 범준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었다며 범준을 칭찬했다. 

그렇게 악역을 자처하게 된 범준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원래 일도 잘했는데 아랫사람들과 협력 업체를 쥐어짜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범준은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역할에 괴로워했지만 언젠가부터 자신의 원래 성격이 그랬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그리고 범준은 사회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또한 퇴근을 하면 다시 평소의 친절한 범준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범준은 착한 사람이었다.


범준은 어느새 회사의 부장이 되었다. 범준이 친절하던 시절을 아는 사람보다는 지금의 범준을 아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회사에서 들들 볶는 범준 때문에 힘들어하는 직원들이 속출했지만 범준은 그렇게 해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장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세세한 것까지 잡아내는 등 마이크로 매니징을 했지만 그로 인해 성과가 나왔다. 또한 범준은 라인도 잘 타서 부장 이상의 직위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임원까지 다는 것은 무리가 없다는 평가였다. 범준 밑의 직원들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차라리 범준이 임원으로 올라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모두가 범준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같이 일할 때는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성과 자체는 잘 챙겨주는 범준이었기 때문에 성격이 맞는 사람들은 범준을 좋아했다. 그리고 직원들 개인적으로 힘들 일이 있을 때는 위로해주는 인간적인 상사여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범준은 자신만을 위하는 탐욕은 부리지 않았다. 


오늘 범준은 직원들을 들들 볶았다. 회의 시간 내내 소리도 지르고 화를 내는 범준 때문에 회의실은 얼어붙었다. 화를 낼 때 범준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범준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범준은 과장을 따로 불러 다시 혼냈다. 이른바 내리 갈굼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과장은 다시 밑의 사람을 불러 일을 똑바로 하라고 시켰다. 범준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이제야 일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 범준은 송전무와 점심을 먹었다. 송전무는 회사의 실세 중의 하나로 범준이 무척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범준을 임원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송전무는 밥을 먹으며 범준에게 넌지시 일을 하나 던졌다. 살짝 귀찮은 일이지만 범준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범준은 송전무에게 일을 잘 성사시키겠다고 했다. 송전무는 그런 범준을 흡족해했다. 

사무실로 돌아간 범준은 송전무에게 받은 업무를 검토하면서 당장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을 확인했다. 뭔가 일이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자 범준은 이번에는 실무자를 불러서 닦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정차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실무자를 불러서 일을 다이렉트로 명령하는 범준의 태도에 정차장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도 승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원들과 대리급들은 사정이 달랐다. 역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들끼리 술자리를 가질 때 범준을 비롯한 상사들의 이야기는 인기 많은 술안주 거리가 되었다. 

불금이라 다들 이른 퇴근을 기다리고 있지만 범준은 금요일이라고 바로 퇴근하려는 직원들의 태도가 불만족스러웠다. 할 일이 없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지만 지금처럼 바쁠 때도 그래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범준도 칼퇴근까지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범준은 은연중에 직원들에게 정시 퇴근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래서 아래 직원들은 범준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마침내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범준은 바로 퇴근하지 않았다. 범준은 눈치를 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일 끝났으면 다들 마무리하고 가라고 했지만 바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20분 정도 지났을 때쯤 범준은 그러고 보니 오늘 아들이 할 말이 있다며 범준에게 일찍 들어오냐고 아침에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차 싶었던 범준은 월요일에 일찍 출근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준이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고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부장이 퇴근한 것을 확인한 다른 직원들도 그제야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이제 진정한 불금이 시작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범준은 아들 앞에서 다시 친절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착한 아버지. 그것이 가정에서 범준의 모습이었다. 


범준은 여전히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악역이 되었다고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아도 회사 일적인 것이라면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게 현재 범준의 생각이었다. 


‘누구도 악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지. 그래서 내가 해야 해. 그래야 회사가 돌아가거든. 나는 내 일을 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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