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Jun 04. 2022

6월 4일 임현우의 하루

이별 후 첫 주말

지난 수요일, 우리는 헤어졌다. 5년의 연애였다. 우리의 사랑은 지난주 끝난 드라마 속 커플보다 못한 것이 되었고 항상 곁에 있어달라던 그 말은 공허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젠 유명한 연예인보다 더 쉽게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낯선 외계 행성으로 떠나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라면 이리 슬프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사라져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면 이보다 아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사는 서울에, 내가 항상 출근하는 거리에서, 내가 자주 가는 장소에서 언제든지 다시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5년 연애의 끝은 그렇게 다가왔다.


수요일 밤에 헤어지고 펑펑 울었고 목요일에는 애써 괜찮은 척 태연하게 있으려고 했다. 금요일에는 다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이별 후 첫 주말이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했고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계속해서 생각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기억의 영화관은 오늘도 나를 맨 앞 열로 인도했다. 그녀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담긴 장면이 보인다. 슬픈 장면도 아닌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첫 이별은 아니었다. 하지만 5년 간 사랑했던 그녀와의 이별은 첫 이별보다 더욱 아팠다. 그녀를 알고 지낸 세월이 5년보다 더 길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 뒤에 앉았던 그녀를 나는 남몰래 좋아했다. 괜히 그녀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어설픈 사랑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취업 스터디에서였다. 나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이제 어른이 되어 얼굴은 조금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모습은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나의 정체를 밝힌 건 스터디 뒤풀이에서였다. 그녀는 무척이나 놀라며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임현우가 맞는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지만 어른이 되어 만난 우리는 무척이나 잘 맞았다. 서로의 취미도 좋아하는 영화도 가장 인상 깊게 본 책도 동일했다. 나는 어쩌면 그녀와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취준생이었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기회였다. 나도 내가 지원한 회사 면접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시 서로 멀어질 뻔했지만 운명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 우리는 서로 원하는 회사에 합격했다. 취업 스터디 멤버 중 취업에 성공한 사람끼리 가진 술자리에서 나는 그녀와 더욱 가까워졌다. 그날, 나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줬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놀랍게도 내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나를 좋아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나도 그녀를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그날은 우리의 사랑을 처음 확인한 날이었다.


서로의 회사는 달랐지만 근처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퇴근 후 자주 만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빨리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제 사회 초년생인 우리에게는 아직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언젠가 나와 결혼하자는 말을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별에는 항상 거창한 이유가 붙지만 실제로는 정말 별것 아닌 것으로 연인들은 헤어진다. 우리도 그랬다. 5년 간의 사랑은 서로를 굳게 믿게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크고 작은 다툼은 조금씩 서로를 부수고 있었다. 서로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맞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고 서로의 이해하려는 시간은 점점 적어졌다. 처음에는 가까운 곳에 있어 자주 만났었지만 5년이 지났을 때는 만날 시간을 제대로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서로에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징조가 잠시 스쳐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태도가 변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고 다툼이 있으면 오히려 그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녀는 나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지난 수요일, 우리는 헤어졌다. 누구도 서로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도 눈물을 보였다. 거창한 이별도 아니었다. 그저 눈물만 흘렸을 뿐 자연스럽게 찾아온 과정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 사라졌다. 그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잘한 것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년의 연애는 끝이 났다.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의 전화였다. 그는 내 소식을 어찌 알았는지 술을 사주겠다고 나를 불렀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당장이라도 내 집에 들어와서 나를 끌고 나갈 것 같은 목소리로 당장 나오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친구가 부른 장소로 갔다.

막상 친구를 만나니 그가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쏟아냈다. 내가 그녀를 얼마라 사랑했는지 우리의 관계가 어찌 끝나게 되었는지 그에게 말했다. 친구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말을 하다 보니 내 변명도 하게 되었다. 한참 이야기하던 나의 비겁함에 놀라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럴 때면 친구는 말없이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나에게 조용히 건배했다. 친구에게 말을 다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밖이라서, 애써 울음을 참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나는 이번엔 내 잘못을 이야기하며 나 때문에 그녀와 헤어진 것 같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또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마시던 술잔을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인연이 아닌 거지. 네 잘못도 그 애 잘못도 아니야. 서로 사랑했고 좋은 기억도 만들었잖아. 다만 둘이 그 이상의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 많아. 불같이 사랑했지만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사랑이 꼭 결혼한다고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잖아? 모든 인연에는 끝이 있고 너희에게는 그 끝이 조금 빨리 찾아왔을 뿐이야. 서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서로 좋은 기억을 남겼으면 된 거야. 말하고 나니 헛소리 같은데…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은 없어. 그러니깐 너무 자책하지 마. 슬퍼할 수는 있지만 자책하지는 마.”


말이 없던 친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의 말처럼 슬픈 것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에서 그동안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쭉 살펴봤다. 5년 이상이라는 시간은 오늘 하루 동안 볼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대화로 남아있었다. 그녀와 좋았던 시절을 보니 다시 눈물이 났다. 미안함과 후회를 넘어 미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겨우 이성의 끈을 잡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어제 제대로 자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마음 한편에 남은 그리움 때문에 여전히 심장이 떨려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은 언제쯤 진정이 될까? 아직 헤어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훌훌 털어버리기를 바라는 건 내 욕심일까? 헤어지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잘 헤어진 게 되는 것일까? 생각이 다시 복잡해진다.


언젠가 이별이 극복되긴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던 것처럼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다시 천장을 보며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된다. 이번엔 가장 보기 싫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 상영된다.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전 09화 6월 3일 박범준의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