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Jul 07. 2022

7월 7일 정한수의 하루

레퍼런스 체크

퇴사를 할 때는 절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헤어질 때라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다. 너의 감정에 이끌리면 결국 그것은 너의 피해가 된다.


아주 오래전 내가 정말 존경하던 선배가 회사를 떠나면서 나에게 남긴 말이었다. 당시 회사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어떻게 하면 나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선배는 알고 있었고 그가 떠나면서 나에게 마지막 조언을 해준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선배의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선배가 꽤나 신사적인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니 그 선배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나는 평화롭게 회사를 떠났다. 그 누구에게도 원한이 되지 않은 채 말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오늘, 평소처럼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업무 특성상 전화를 받을 일도 없었기에 나는 전화를 무시했다. 그 이후로 한번 더 그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번호를 차단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핸드폰 화면으로 보이는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보니 단순한 스팸 전화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전화를 거절하고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뒤집어놨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오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어 핸드폰을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나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음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모르는 번호는 나의 문자에 답장을 남겼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0000 인사팀 정은명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에 지원하신 김문진 님의 레퍼런스 체크를 위해 정한수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통화가 되시는 시간 말씀 주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김문진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잠시 굳어버렸다.


‘김문진? 문진님이 나보고 레퍼런스 체크를 해달라고 했다고? 그 김문진이?’


나는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동료들에게 미안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따로 먹겠다고 하고 무리를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계속 김문진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쳤나 봐. 여기 레퍼 체크는 아무한테나 하는 건가? 지원자가 지정하는 거 아닌가? 근데 김문진이 나를 지정했다고? 이게 뭔….’


나는 갑작스러운 문자 내용에 당황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만큼 김문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른 회사에서 묻는 것은 나에게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김문진. 그는 나의 회사 동기이자 내가 가장 싫어한 사람이었다. 그와는 표면적으로는 무척 잘 지냈다. 항상 웃으면서 그를 대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항상 잘난 척을 하고 공감 능력은 거의 없으며 이기적이었다. 성과도 자신이 다 챙겨가려고 했고 가식적으로 상대방을 대했다. 이런 그에게 대놓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러고 싶었지만 선배가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항상 참아왔다. 하지만 어차피 나 말고도 김문진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은 넘쳤기 때문에 내가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한 몫했다. 

김문진에 대해서 가장 정이 떨어진 것은 그가 퇴사할 때였다. 그는 퇴사할 때 한마디로 말해 회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상사와 싸우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분위기를 박살 냈다. 그런 그가 시원시원하다며 뒤에서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사람이 나가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이때서야 선배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결코 쿨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김문진이 결코 잘한 것도 아니었다. 

이밖에도 김문진이 일으킨 문제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 흘러서 김문진이 얼마나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레퍼런스 체크를 요청한 것이었다. 퇴사 후 나와 연락한 적도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다. 도대체 왜 그가 나의 무엇을 믿고 이런 일을 했을지 이해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추측되는 것은 있다. 그의 성격이라면 그의 편이 되어준 사람은 아마 많이 없었을 것이고 그나마 나와는 표면적으로 잘 지냈기에 나를 지정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를지도 모른다. 회사를 다닐 때는 굉장히 얄미운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바로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점심시간이실 텐데 죄송합니다. 저 연락 주신 정한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점심은 더 늦어서 괜찮습니다. 0000 인사팀 정은영이라고 합니다. 잠시 김문진님에 대해서 문의드릴 것이 있는데 통화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간단한 체크 정도라 생각했지만 0000이 요청한 내용은 꽤나 자세했다. 오히려 내가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장이 되는 순간도 있었다. 김문진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가 어떤 사람들이랑 잘 지냈고 어떤 단점이 있었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특이한 점은 질문의 내용이 다 김문진의 부정적인 면모를 살피려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김문진을 안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의 인생까지 망치기는 싫었다. 그래서 최대한 좋게 말하려고 했다.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오히려 김문진에게 나중에 전화를 걸어서 이 회사를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만큼 인사담당자가 묻는 내용들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원래 이러는 것을 수도 있지만 원래라도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면접에서 통과되었으니 마지막 과정으로 레퍼런스 체크를 하는 것일 텐데 이런 태도가 과연 맞나 싶었다. 전화 통화를 하며 나는 점차 김문진을 응원하게 되었다. 나는 김문진의 단점은 최대한 담백하게만 말하려고 했고 장점을 돋보이게 설명하려고 했다. 

레퍼런스 전화는 20분이 넘게 진행되었다. 슬슬 나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인사담당자는 김문진의 최고 장점에 대해서 나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긍정적인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꼼꼼한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내 답변이 끝나자 인사담당자는 감사했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괜히 내 마음이 찝찝했다. 김문진에 대해서 말한 것이 그의 인생에 악영향을 끼칠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잘 말해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레퍼런스 체크를 요청한다면 김문진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그의 끝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가 말했던 “헤어질 때라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다. 너의 감정에 이끌리면 결국 그것은 너의 피해가 된다.”라는 말은 김문진을 위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것 때문에 그의 인생이 안 좋게 풀리기는 원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성격을 이제는 고쳤을 수도 있고. 나는 오랜만에 김문진에게 전화하려다 괜히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빠르게 먹었다. 

이전 07화 7월 6일 안민수의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