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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Aug 24. 2022

8월 24일 남가현의 하루

전시회

지하철에서 내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집에 들렀다. 어제 미리 주문해둔 꽃다발을 픽업했다. 친구가 좋아하는 노란색 꽃을 많이 넣어달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굉장히 아름다웠다. 꽃다발을 들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은 친구인 영미의 미술 전시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원래 미술을 전공했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던 친구는 3년 전부터 다시 용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첫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나는 친구로서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전시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하니 한껏 차려입은 영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영미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영미는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는 그녀의 그림들을 봤다. 평소 그녀의 성격처럼 통통 튀는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색이 많이 들어간 그림들도 보였다. 나는 그림들을 보며 예전 일을 떠올렸다.


영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무척 잘 그렸다. 특히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너무 사실적이면서도 장점이 잘 드러나게 그렸기 때문에 그녀의 그림은 인기가 많았다. 그녀는 인물화만 잘 그린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영미가 자신이 그린 풍경화를 보여줬는데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 모습에 압도되었다. 나는 영미가 언젠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 나는 영미에게 미리 싸인을 받아놔야겠다고 말했었다. 그런 그녀가 미술을 전공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계속 같은 학교였지만 다른 대학교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미와 멀어졌다. 한동안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고등학교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나는 영미가 너무 반가워서 그녀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 보였다. 결혼식이 끝난 후, 친구들끼리 간단하게 커피를 마셨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소식을 묻게 되었다. 당연히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았던 그녀는 전혀 의외의 답변을 했다. 영미는 어떤 회사에서 영업일을 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술일을 안 하는 것도 그런데 학창 시절 수줍음이 많았던 그녀가 영업일을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영미는 여전히 수줍게 웃으면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만 말했다. 

그 이후로 영미와는 아주 가끔 신년 안부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각자 한두 명의 아이가 있는 엄마가 되었고 어린 시절 우리의 꿈보다는 아이의 꿈이 더 중요해졌다. 영미 역시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미는 나에게 다시 미술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40살이 넘은 시점이라 나는 그녀가 취미로 다시 미술을 시작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미술을 다시 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는 3년 안에 자신의 이름을 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40살이 넘어서 내 또래인 사람이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꿈을 응원하면서 그 일이 잘 될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미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미술학도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런 과정을 자신의 SNS에 올렸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어떤 과정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지 볼 수 있었다. 의구심은 점차 그녀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나이에 그녀가 보이는 용기와 도전정신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른 것 같았다. 

1년 정도 지난 후, 영미는 나에게 어떤 링크를 보내왔다. 영미는 나에게 자신의 작품만을 올리는 새로운 SNS 계정이니 꼭 팔로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계정을 팔로잉했다. 하지만 SNS는 한 달 넘게 어떤 게시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내 피드에 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계정의 존재에 대해 아예 까먹고 있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내 피드에 어떤 그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노란색으로 표현된 아주 독특하고 기품 있는 그림이었다. 바로 영미의 그림이었다. 누군가의 자랑 정도가 올라오던 내 SNS 피드에 이런 그림들이 올라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너무 아름다웠고 매력적이었다. 영미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새로운 그림을 올렸는데 나는 매일 그녀의 새로운 그림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그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영미의 계정에는 팔로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어느새 2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팔로워는 10만 명이 넘었고 영미의 그림은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 기사에서 영미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이 워낙 유명해져 이제는 언론사에서도 그녀를 찾게 된 것이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그녀의 계정에는 더 많은 팔로워가 생겼다. 

그리고 올해, 영미는 나에게 이번 여름에 자신이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올해는 그녀가 미술을 다시 시작한 지 이제 3년째가 되는 해였다. 3년 안에 전시회를 열겠다는 그녀는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전시회에서 나는 영미의 그림들을 천천히 살폈다. SNS에서 보던 그림도 있지만 이번 전시회를 위해 새롭게 그린 작품들도 많았다. 나 말고도 영미의 작품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했다. 꿈을 이룬 친구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모든 그림 감상을 마치고 영미에게 몇몇 작품 중 하나를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영미는 무리해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친구로서 돕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미라고 하는 작가의 팬으로서 구매를 하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영미는 담당자를 소개해주면 그림을 구매하는 절차를 안내했다. 담당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영미가 그린 그림 하나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아직 전시회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림은 나중에 받기로 했다. 

영미는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오히려 영미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녀가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가 어릴 적 꿨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고 나이를 먹어서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도전은 단지 그녀, 한 사람의 도전이 아니었다. 그녀의 도전을 보며 나 역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나는 영미에게 손을 내밀고 그녀의 새로운 미래를 응원했다.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영미처럼 내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꿈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솔직히 지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고 늙지는 않을 것이다. 영미처럼 언젠가 내 꿈을 이루고 밝게 웃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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