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시댁에 가는 마음은 무거웠다. 격주로 일요일 저녁을 함께 식사하는 것이 다이지만 아버님의 약주 후의 대화는 담담해지려고 해도 마음에 아프게 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댁을 들리는 주말은 늘 마음이 무겁고 설레지 않는다.
주말이라 해서 딱히 무얼 하며 보내는 것은 아니다. 평일에도 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전업주부의 장점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패턴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조이고 늘리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덜 자란 지금 손이 가는 부분이 아직 많은 게 사실이고 다섯 식구의 생활이 굴러가기에는 은근히 신경 쓰고도 티 안 나는 살림이라는 부분들이 많이 산재해있다. 어쨌든 다른 이들보다 평일을 사용하기 좋은 조건이지만 주말은 이런 나에게도 괜스레 설렌다. 그리고 무언가 공백으로 놔두고 싶은데 정한 듯이 정기적으로 들리는 시댁은 십 년 차가 넘어가는 주부인 나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손주사랑이 유별나셨던 아버님은 주말마다 아이들을 만나야 직성이 풀리셨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할아버지와 데면데면해지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버님의 지극한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고 이제는 애처로운 짝사랑이 되어버렸다. 초밥을 사 줄 테니 오라고 많이 구슬리셨지만 오늘 시댁에 갈 때에는 아이들이 동행하지 않았다. 애들은 스스로 자신들만의 주말을 찾아갔다.
시댁에 당도하니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의 행방을 물으시던 아버님. 실망의 기분을 감추실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이 오면 꼭 사주시겠다던 초밥을 어른들끼리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일식을 좋아하는터라 신이 났다. 그리고 견디기 힘들었던 아버님의 약주의 시간을 피할 수 있어 더더욱 신이 났다. 예기치 않은 주말의 메뉴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했다.
점심을 늦게 일어나서 먹은 터라 이른 저녁이 생각이 없었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는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열개 남짓한 초밥을 먹는 동안 얼마나 잘 넘어가던지. 배가 너무 부를 수도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부터 한 개씩 섭렵해나갔다. 어느새 열개를 다 먹고 어머님이 남기신 초밥까지 먹고 있었다. 만 원짜리 세트를 주문하면 초밥과 함께 우동이 나오는데 사실 맛이 있지는 않았다. 심심한 가쓰오 국물은 맛이 있기에는 부족했지만 가게의 분위기 때문인지 잠시 나를 상상에 젖게 한다.
맛있는 우동을 먹기 위해 일본에 온 것이라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대기 시간을 기다려 이제 막 따끈한 한 그릇을 받아 든 것이라면. 나지막이 이타다키마스를 중얼거려본다. 앞자리의 시부모님과 옆에 남편 그리고 대화들이 공중에 사라진다. 그릇을 다 비우면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게 될까. 기둥 옆 인조 사쿠라가 분홍빛을 마구 뿜어낸다.
여행은 일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어떠한 공간 속에 속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시간에 나는 여기 있지만 마음은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것. 씁쓸한 위로 같지만 나는 충분히 잠시의 잡념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 일본은 다녀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