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달을 맞이해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옛날 어르신들은 가족은 씨족의 의미가 강한데 요즘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을 볼 수가 있다. 사춘기를 맞는 큰아이는 같은 성끼리도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릴 수 있냐고 물었고 요즘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끼리 가족을 만드는 형태 또한 지켜볼 수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가족들이 생겨나는 것은 새롭기도 하고 인간의 환경적응력에 있어서 뛰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늙어서 외롭다는 옛 어머님들의 전형적인 걱정을 뒤집어버렸으니까.
사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같이 사는 식구들만 포함한다고 생각하지만 옛날 세대를 살고 계신 우리 시아버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아버님 늘 하시는 말씀대로 혈혈단신으로 살다가 기껏 아들 둘 낳았는데 형제가 많길 하나 서로 위해주고 살아야 한 다시지만 우리 집은 그렇게 화목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 후 새 식구인 나의 등장을 시작으로 삐그덕 대기 시작했고 결국 큰집은 아버님과 왕래를 끊기에 이르렀다. 그 후 몇 차례 아버님과 큰집 간의 다툼이 있었고 몇 년간 소식이 두절되었으나 최근에는 아주버님만 아버님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형님의 부재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실질적으로 행위를 했냐 안했냐로 역할을 규정짓는다면 할 말 없지만 역할이 주는 마음속 은연중의 부담감까지도 고스란히 나는 안고 살았다. 아버님은 그 시대 사람들 치고는 상당히 개혁적인 부분도 일부 있어 혼자 며느리의 노릇을 감당해내는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무던히 노력하셨다. 하지만 시집을 온 후 두 해정도 얼굴을 보고 지낸 형님이 내게 가족으로 다가오기란 그 부재의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아주버님과의 화해로 아버님에게 가족의 정의는 새롭게 바뀌기 시작했다. 보고 지내지 않는 큰집 식구들까지로 바운더리를 넓히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나와 형님과의 관계는 까맣게 잊기 시작하셨다. 동의 없이 홀로 결정하신 가족사진 제의에 나는 당황했고 아버님께 화를 냈다. 두 집 따로따로 찍으면 어떻겠냐고 설득하셨지만 이미 상처 받은 마음은 풀릴 줄을 몰랐고 나의 고집에 결국 아버님은 큰집만 참여하는 반쪽짜리 가족사진을 찍고 마셨다. 죽기 전 노인의 소원이라는 이야기도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아버님의 죽기 전 소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형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좋은 관계로 가기에는 어려웠다. 형님은 나에게 너나 나나 서로 가족이나 되냐고 관계를 정의했다. 맞는 이야기였고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서로 편할지도 몰랐다. 원래 없는 사람들처럼. 맞지 않는 톱니가 굴러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님과 나는 이제 와서 다시 맞추어 보기에는 너무 넓은 강을 건너버렸고 그 문제의 중심에는 아버님이 계셨다. 그리고 각자의 입장 차이는 좁히기 힘들었다.
소원하게 지낸 만큼 형님에 대한 감정도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시댁을 홀로 겪으면서 형님이 이래서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인정보다 힘이 세서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이해가 가는 순간들이 쌓여갔다. 미운 것은 미운 거고 사실은 사실인데 마음의 판단은 감정에 많이 휩쓸린다. 같은 감정선들을 나도 따라가면서 그녀가 밉다고만 이야기하기에는 점점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결혼생활의 어려운 점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월은 시작부터가 쉬는 날들의 연속이라 부담스럽다. 재량이 많으신 학교장님들은 재량 휴교일 까지 겹쳐서 미니 방학을 만들어주셨고 세 아이가 집에서 밥줄 때만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는 쉬는 날들이 부담스럽다. 폭풍 같은 휴일들을 보내다가 주말이 되면 어버이날 행사로 시댁과 친정을 방문해야 하고 작년에는 어떻게 했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일 년에 한 번인 어버이날이라고 하면 부담감에 젖어있는 내가 나쁜 딸이자 며느리이겠지만 주말마다 얼굴을 뵙는 집들에게 일 년에 한 번인 이 날이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올까 싶다. 가정의 달만 되면 매출이 급감하는 자영업자인 우리 집으로서는 가정의 달은 힘이 든다. 명절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무슨 날이라며 한숨을 쉬던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어버이날을 두고 양쪽 집에 어떻게 해드릴까 의논하다가 불쑥 찾아든 형님의 기억이 오늘 이 글을 쓰게 했다. 용돈을 드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드릴 거면 양쪽 집 똑같이 드리자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 나에게는 안 좋은 감정만 남아있는 그녀지만 같은 며느리로서 잠시 그녀를 안는다. 그 시절 내 나이였던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 부담스러운 마음들. 모두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미워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란 쉬운 것은 아닌데 나이를 먹어가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가 보다. 인정하기 싫은 것도 인정하고 넘어가는 때도 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