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생활
아파트 후문에 분식집 포장 마차가 있다. 이 동네의 초등학생이 모두 모여있는 핫플레이스. 삼천 원이란 돈만 있으면 친구들에게 한턱 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곳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돈을 아껴주기 위해서 직접 떡을 튀겼다. 매일 놀러 오는 막내의 단짝도 어제 이천 원의 용돈을 받았지만 제발 아껴 쓰라는 엄마의 말씀에 주머니에 꼭꼭 넣어둘 뿐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금액으로 밀떡 한 봉지를 사다가 꼬지에 꽂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참 달짝지근한 맛을 좋아한다. 예전의 나도 그랬고 어릴 적 나의 엄마도 그랬고 태초의 누군가의 유년시절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찾은 단맛. 예를 들어 꽃이 간직한 꿀이나 우연히 먹어본 사탕수수 등에서 즐거움을 찾았겠지. 이것은 윤회의 증거다. 단맛의 기쁨을 기억하는 것. 어쨌든 최대한 총체적 단맛을 끌어올려 노릇한 떡꼬치에 소스로 발라서 아이들에게 준다. 다들 사 먹는 것보다 맛있다며 웃는다. 앞동의 친구에게도 가져다준다.
포장마차 아주머니처럼 아이들의 식성을 고려해 두 가지 맛으로 도전해본다. 하나는 우리가 다 아는 맛인 빨간 양념. 케첩을 섞은 소스가 달콤함에 새콤함을 더해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얀 떡꼬치. 매운 것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아서 하얀 떡꼬치가 생겨났다. 언젠가 막내가 사들고 들어온 적이 있는데 왜 소스도 안 바르고 튀긴 떡만 들고 들어왔냐고 깜짝 놀란 나는 물어봤더랬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아이는 말했다.
-엄마, 이건 하얀 떡꼬치야. 원래 이래.
자세히 보니 떡이 닿은 온도에 녹아든 설탕들이 울퉁불퉁하게 입혀져 있었다. 튀긴 떡에 바른 흰 설탕이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생소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맛이었다. 단맛과 떡이 조화된 단순한 맛. 때로는 가장 단순할 때가 오히려 매력적일 때가 있다.
굳이 안 해주어도 된다는 김장을 해주겠다고 엄마가 집에 왔던 날, 세 아이와 아이들의 친구들까지의 간식을 연신 챙겨대는 나를 보며 대단해했을 때가 있었다. 엄마 눈에는 항상 어린아이니까 아이들 챙겨주는 엄마로서의 내 모습은 경이롭게 다가왔나 보다. 그 날 이후로 엄마는 나의 '힘듦'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대로 닮아가는 나를 보고 난 후 엄마는 더 이상 잔소리하기를 멈추었다.
떡의 말랑함은 스트레스를 가져가 준다. 어떤 떡에서도 볼 수 없는 쫄깃함이 떡볶이 떡에 있다. 쌀떡은 푹 퍼진 푸근함 같은 매력이 있다면 밀떡은 뺀들거리는 사회성 밝은 친구처럼 미끈대는 쫄깃함이 있다. 바삭하게 튀겼을 때는 떡 안의 식감이 식스센스급 반전으로 다가온다. 잘 튀겨질수록 속은 더 연하다. 버석대는 우리의 삶도 그 안에 숨겨둔 쫄깃한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삶도 떡꼬치 같은 반전감 있는 식감으로 가득 차 있기에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먹을 때 생각이 가장 많아진다. 할 말도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