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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드디어 찾은 제주 일상 속 낙 (樂)

매일 밤 내가 걷는 이유

제주 기록, 2021년 8월 9일 월요일


7월 초 즈음, 나는 드디어 제주 일상 속 하나의 낙을 찾았다. 사실 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지만 나는 하루 중 이 시간만을 기다리니, 나한테는 낙이 확실히 맞긴 하다. 그 낙이란 모든 일을 다 끝낸 밤 10시 즈음, 서귀포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월드컵 경기장을 걷는 일이다.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는 뛰고 걷기 좋은 트랙과 농구 코트와 근린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운동 기구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늦은 시간에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나는 이렇게 끈적이는 여름밤에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헉헉거리면서 폭신한 붉은색 트랙 위를 뛰는 사람들, 밝은 불빛 아래 농구 코트 위에서 분주하게 주황색 공을 따라 움직이는 학생들,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날아가는 셔틀콕을 있는 힘껏 치는 부부, 그 옆에서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연습을 하는 아들 두 명.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들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그리고 '건강한 삶을 즐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그 무리 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 또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아 묘한 안도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사실 여름밤이든 겨울밤이든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머릿속이 무거운 고민들로 가득할 때, 마음속이 뿌연 안개로 가득할 때,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일단 밖으로 나간다. 걷기 편안한 운동화가 아니어도, 땀 흡수가 잘 되는 운동복을 입지 않아도, 일단은 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저 마냥 걷는다. 

 

7월 초에 걷기 시작한 것도 지금 돌아보면 '살려고' 걸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복합적으로 여러 고민과 생각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슬럼프가 절정에 달하던 무렵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내 손을 먼저 놓고 떠나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지금까지 상처 받고 생긴 내성 때문인지, 나는 뭔가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내 인생에 턱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오히려 덤덤하다. 정확히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덤덤한 척을 잘한다. 하루 종일 아주 얇고 가느다란 정신 줄이라고 쓰인 실을 양손에 힘을 준 채로 꽉 잡는다. 그리고는 '나한테 더 잘 된 일이라고, 나는 이전보다 더 잘 살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살아낸다. 


이렇게 온몸과 온 정신에 힘을 꽉 준 채로 살아가다가 유일하게 양손에 꽉 줬던 힘을 풀어도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게 바로 내겐 걷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도 걷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걷는 내내 아무런 노래도 듣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한다. 그때 머릿속에 어떤 고민이나 생각이 찾아오면 그대로 반겨준다. 좋든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런데 그 생각과 고민은 때론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가볍고 증발성이 강해서 바람과 같이 잠시 머물렀다가 곧장 떠난다. 그렇게 걷다 보면 구름 낀 밤하늘 사이로 반짝이는 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하면서 푹신한 바람을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피부로 맞이한다.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아니, 이 순간 때문에 걷는다.  


이 순간, 여름 바람과 함께 내 머리와 가슴에 도착하는 한 줄의 메시지가 있다.

'아.. 좋다.. 살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도 나는 걸었나 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와 딱히 어떤 약속을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걸었다. 가방에는 무거운 노트북이 있더라도, 사이즈가 큰 슬리퍼를 신어서 걸음이 불편할지라도,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으면 우산을 챙겨서라도,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았음에도 자는 시간을 미뤄가면서, 그렇게 걸었다. 사실은 내가 왜 그렇게 걷고 싶어 했는지, 하루에 끝에 그 시간만을 왜 그렇게 기다렸는지 그 이유는 잘 몰랐다. 그냥 걸을 때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 시간이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게 사람이 됐든, 밤하늘에 별이 됐든,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 바람이 됐든, 그게 어떤 존재일지라도,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아.. 좋다.. 살 것 같다..'라는 이 말을. 


여기서 '살 것 같다'라는 말은 곧 내게 

"그 가느다란 정신줄을 꼭 잡고 하루를 버텨내느라,

너에게 예고 없이 닥친 일들을 원래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는 듯이 초연한 척 연기해내느라,

한순간도 덤덤하지 않지만 때론 너 자신을 속여가며 덤덤한 척 단단한 척 씩씩하게 살아내느라,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고." 그렇게 들렸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쓸 때 없는 의심이 들어서 누군가에게 그 답을 듣고 싶을 때면,

지독히도 외로울 때 누군가의 목소리로 온기 있는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길 위를 걸을 것 같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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