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복 Nov 30. 2024

드디어 알아낸 삶의 의미

오래된 궁금증 2

한때 번아웃이 왔었다. 에너지가 소진된 것이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무기력이었다. 더는 쓸 에너지가 없으니 나자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은 아주 고약한 일인데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서둘러 빈 에너지 창고를 채우기 위해서, 또다시 에너지 고갈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삶의 의미'같은 거창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사는가.


한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있었지만 일단의 결론은, 태어났으니까 그냥 사는 거다 정도였고 이건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여기저기에서 들은 공통된 답이기도 했다. 의미에 너무 골몰하게 되면 사는 일에 더 큰 기대를 갖게 되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움이 더 커진다는 게 그 근거였다. 지친 당시로서는 맞는 답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의미 없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삶에 의미와 목적이 없다면 때로는 고통으로 가득하기만 한 삶을 버티는 일이 고문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철학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이렇다 할만한 답을 냉큼 찾아내지는 못했다.


<삶의 격(페터 비에리, 은행나무)>도 그런 노력의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얼마 전 ‘물은 셀프, 자유도 셀프’라는 글을 쓰다가 절에 챙겨갔던 그 책이 생각난 김에, 다시 꺼내서 읽고 있다.


존엄성을 주제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을 천천히 따라 읽는 사이에 문득 찾아온 통찰이 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질문 '과연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정말로 '문득'이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인간 개체가 태어나기 위한 기본 조건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체로 인간의 애정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랑의 결과물인 셈.

 

사랑의 행위로 인간이 태어난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생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 힌트가 아닐까. ‘너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생각해 봐. 그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거야.‘ 신의 말풍선 안에 들어갈만한 대사를 상상해 보며 생각을 키워나간다. 사랑의 행위로 태어난 인간들이 삶에서 누려야 할 단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경험의 주체'인 인간 각자가 처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요 권리가 아닐는지. 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연인, 자녀, 친구, 반려동식물 등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잃으며 인간은 성장해 나가지 않던가.


사랑을 ‘진심으로 상대를 아끼고 존중하며 북돋우려는 마음’ 정도로 정의하면 될까. 그 마음을 온전하고도 계산 없이 베푼다면 결국 최대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일 터. 바꾸어 말하면 내 에너지 창고부터 채워질 거란 얘기다.


어쩐지 전부터 이 노래가 좋더라니. 진리가 담겨 있어서 그랬나 보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직전, 생각나 버린 명곡.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알고 보니 상당히 심오한 노래였다. 어쨌거나, 임무를 마치고 태어난 별나라로 복귀하는 그날까지, 사랑 밖엔 난 몰라. (의도치 않게 심수봉 특집) (2024112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