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후버 댐➡️윌리엄스➡️세도나(339km, 6시간)
보스턴→라스베이거스→세도나→플래그스태프→그랜드캐년→페이지(Horseshoe Bend, Antelope Canyon)→모뉴먼트 밸리→ 모압(Arches NP, Capitol Reef Np)→브라이스캐년시티(Bryce Canyon NP)→스프링데일(Zion Canyon NP)→라스베이거스→보스턴
최악이었던 라스베이거스 서커스서커스 호텔에서 머문 시간은 단 4시간. 오전 7시 반도 되기 전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고양이 세수만 하고선 체크아웃을 하러 미련 없이 방을 나왔다.
전날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새벽에서야 호텔에 도착해 선잠을 자 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기괴한 호텔의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은 그랜드서클 2600km의 여정을 함께 할 가장 중요한 파트너를 만나는 날이다.
호텔에서 10여분 떨어진 Hertz 렌터카 카운터에 도착했다. 카운터는 크지 않았는데 콘래드 호텔 로비에 있는 스타벅스 바로 옆에 있어 지나칠 뻔했다.
여러 캐년을 돌다가 혹시라도 거친 오프로드를 달려야 하는 경우가 있을까 봐 세단 대신 SUV를 예약해 놨다. 체크인을 하니 차는 호텔 주차장 5층에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차종은 랜덤 배정이었다. 보스턴 집에 있는 닛산 SUV 정도면 만족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쉐보레 트랙스가 당첨됐다.
그것도 아직 플레이트(번호판)도 달지 않은 새 차였다. 차량에 문제가 없나 살펴보다가 번호판이 없어 당황해 직원에게 다시 가 물어봤는데, 임시 플레이트 역할을 하는 종이를 전면 유리에 붙여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새 차를 받아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막을 달리는 레드 셰비라니. 이번 여행의 메인 테마인 사암 사막과 어울리는 색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차를 빌린 직후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라스베이거스의 H마트. 지난 4월에 그랜드 오픈한 신규 매장이다. 스트립에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어 접근성도 좋다.
육개장 사발면과 붉닭볶음면 컵라면, 비비고 컵밥, 오뚜기 컵밥을 종류별로 샀다.
미국은 외식비가 너무 비싸서 매끼를 사 먹기엔 부담이 크다. 한국 레토르트 음식도 비싸지만 적어도 사 먹는 것보다는 싸다. 우리가 가는 대부분의 숙소에는 전자레인지가 방에 있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미국 호텔에서는 물을 잘 주지 않아 생수도 24개들이를 사서 차 트렁크에 쟁여두고 먹었다.
김치나 반찬은 차 안에 두면 빨리 상할 것 같아 따로 사지 않았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 6월에는 날씨가 30도 이상 넘기는 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세도나까지 운전해서 가려면 쉬지 않고 4시간 반 정도 걸린다. 이번 14일간의 로드 트립 일정에서 가장 오래 운전을 해야 하는 날이다.
가는 길에 여러 거점을 정해 두고 동네 구경도 할 겸 쉬엄쉬엄 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멈춰 선 곳은 라스베이거스를 빠져나오면 보이는 후버 댐이다. 콜로라도 강의 핵심 거점이다.
로키 산맥에서 시작해 미국 서남부를 거쳐 멕시코 만으로 흐르는 콜로라도 강은 수백만 년 동안 바위를 깎아 애리조나주의 그랜드캐니언과 유타주의 캐년랜즈, 글렌 캐년의 지형을 만들었다.
황량한 사막에서 오랜 시간 협곡과 절벽을 만들었던 '신의 손'과 같은 콜로라도 강은 현대에 들어 인간이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대공황 시기 콜로라도 강의 수위를 조절해 홍수를 막고자 후버댐 공공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이는 실업 해소와 미 서부 지역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또 라스베이거스와 로스앤젤레스 등 서부 대도시의 핵심 전력 공급원으로 서부 지역 경제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후버댐의 곡선 형태의 아치댐의 규모는 상당하다. 물의 압력을 댐 본체가 아닌 댐 양쪽 협곡 벽으로 분산시켜 적은 콘크리트를 사용해도 큰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후버댐의 이면도 있다. 콜로라도 강을 젖줄로 삼았던 나바호(Navajo)와 같은 이 땅의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신성한 곳으로 여겼던 성지가 매몰되기도 하고, 농경지로 삼았던 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버댐 건설을 위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유타 등 7개 주가 맺은 콜로라도 강 물 배분을 위한 '콜로라도 강 협정'에서 나바호 등 원주민이 배제되면서 최근까지 이를 두고 법적 싸움도 진행했다. 최근 유타주정부와 나바호자치국의 합의로 나바호는 연간 100억리터의 물 권리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6시간여에 걸친 운전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대형 트럭도 많고 지루한 직선 길에선 집중력도 쉽게 흐려진다.
후버댐에서 US-93를 따라가다 보면 황량한 사막이 나오다가, 작은 도시가 나오길 반복한다. 에어컨을 틀어놨지만 조금이라도 온도를 낮추면 도로 위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금방 차 안으로 스며드는 날씨였다.
킹맨을 거쳐 Route 66를 따라 셀리그먼을 지나쳤고, 잠시 윌리엄스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윌리엄스는 작은 도시이지만 그랜드캐니언 빌리지까지 가는 기차가 시작되는 곳이라 관광객이 몰린다. 이곳에서 2시간여 기차를 타고 가면 그랜드캐니언까지 간다고 한다. 1900년 초반부터 운영된 기차라 역사도 길다.
20여분 정도 다운타운을 구경하며 졸음을 쫓았다. 이제 1시간 30분만 더 가면 최종 목적지 세도나에 도착한다. 윌리엄스에서 플래그스태프를 거쳐 세도나로 이동하는 경로다. 플래그스태프까지 가는 길은 고도가 높아지는 구간이라 앞서 지나온 사막보다는 숲이 더 많다.
플래그스태프에서 세도나도 향하는 길은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이다. 울창한 숲이었던 산에서 뜬금없이 붉은 사암 지형이 등장해 시각적으로 충격을 준다.
이번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붉은 사암을 보자 운전으로 힘들었던 마음이 한 번에 사라졌다. 가장 운전 난이도가 높았던 길을 무사히 지나왔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세도나는 지형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지구에서 가장 기운이 좋다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지만, 볼텍스라는 지구 에너지가 이곳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숙소가 있었던 벨락Bell Rock은 그중에서도 기운이 가장 세다고 한다.
직접 그 기운을 느낄 만큼 예민하진 않지만, 이 주변의 신비한 분위기는 자연에 도취하도록 하는 어떤 마력이 분명히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초록의 침엽수림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붉은 사암이 대조를 이뤄 다른 지구의 어느 공간에서도 본 적이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세도나에 도착한 날 애리조나주 전역이 뇌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이날 저녁 세도나에도 비가 왔다.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리다가 오후 10시가 되니 많은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곳도 사막은 사막인지 아침이 되니 땅은 대부분 말라있었다.
다음 날 아침 세도나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일인 커씨드럴락cathedral rock을 올랐다. 주차장에서 15분만 걸어 올라가면 이미 산 중턱에 와 있다. 오전 8시경 이른 시간에 와서 그런지 사람 소리보다는 새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시원하게 펼쳐진 세도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엇갈리는 분기점이다. 절벽까지 기어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잡을만한 안전 줄도 마땅히 없고 경사가 꽤나 높아 우리는 산 중턱의 경치로 만족하기로 했다.
캐시드럴락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채플 오브 홀리크로스Chapel of the Holy Cross.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축물이다. 1956년에 세워진 건물로, 주변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점이 꽤나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교회는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비스듬히 지어진 지붕 때문에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높고 크게 느껴졌다. 이곳은 후버댐, 그랜드 캐니언 스카이워크와 함께 애리조나의 7대 인공경관Seven Man‑Made Marvels of Arizona으로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세도나에서 나오는 길에 트라케파크 아츠 앤 쇼핑 빌리지(Tlaquepaque Arts & Shopping Village)에 들려 간단히 커피 한 잔을 하고 이곳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잠깐 들른 화장실에서 깜빡하고 여권과 지갑이 들어있는 가방을 두고 나오는 아찔한 실수가 있었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 없이 온전히 찾았다. 요새 미국 서부 지역 치안이 좋지 않는데,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세도나는 들어가는 길도, 나가는 길도 예술이다. 도시로 들어갈 때는 숲과 사암 시대의 경계를 넘어가는 짜릿한 풍경이 이어졌다면, 나갈 때는 세도나의 여러 사암 지대를 등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고속도로로 나갈 수 있었다. 출발한 지 40여분을 달렸을까 플래그스태프가 나왔다.
플래그스태프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동네다. 15년 전 교환학생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인 앤 아웃 간판. 15년 전엔 없었던 인 앤 아웃이, 정말 생겼다니! 더 무서운 것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동안 변한 것은 이 하나 뿐이라는 점이다.
그랜드서클 로드트립 여행 TIP.
- 렌트카를 빌릴 때 풀커버리지(full coverage) 조항이 붙어있는지 확인하세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가급적 보험 가입을 해놓는 편이 좋습니다.
- 그랜드서클의 주행거리는 2000km를 넘어섭니다. 렌터카 이용 시 주행 거리 제한 없이 원하는 만큼 주행할 수 있는 언리미티드 마일리지(Unlimited Mileage) 조건을 보장 받는 편이 유리합니다.
- 후버댐에서는 댐을 다리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Mike O'Callagan Pat Tillman Memorial Bridge Plaza>와 후버댐을 직접 건너는 <Hoover Dam Visitor Center>를 방문했습니다.
- 세도나의 성십자예배당Chapel of the Holy Cross은 오전 9시부터 운영합니다. 오픈 시간 이후에 가면 주차가 어려울 수 있으니 이보다 이른 시간에 방문하길 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