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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맨손으로 오른 모뉴먼트밸리 토템폴

Page→모뉴먼트밸리(194km, 2시간)

by Tatte
보스턴→라스베이거스→세도나→플래그스태프→그랜드캐년→페이지(Horseshoe Bend, Antelope Canyon)→모뉴먼트 밸리→ 모압(Arches NP, Capitol Reef Np)→브라이스캐년시티(Bryce Canyon NP)→스프링데일(Zion Canyon NP)→라스베이거스→보스턴


1.

모뉴먼트 밸리는 이번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투더퓨처','역마차', '포레스트 검프' 등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곳이지만 오지에 있어 미국 안에 있어도 좀처럼 가기 힘든 곳으로 꼽힌다.


페이지를 떠나 붉은 사암의 황무지 길을 한 시간 30분여 실컷 달리다 보면 모뉴먼트밸리로 가는 마지막 거점도시 카옌타(Kayenta)가 나온다. 거대한 평야에 있어 도시가 잘 눈에 띄진 않지만 나름 대형 마트도 있고, 맥도날드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다. 이곳에 가면 직원들도, 손님들도 대부분 나바호 주민들이다.


15년 전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에 살았을 때도 학교에 원주민 학생들이 많아 익숙한 편이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원주민 지역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나바호 자치국 안에 있음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2.

카옌타에서 문명의 커피를 들이켜고 모뉴먼트밸리로 가는 163번 국도의 마지막 구간을 20여분 정도 더 달렸다. 14일간의 로드 트립에서 중반부에 접어들어 체력은 슬슬 고갈되는 상황이었지만, 모뉴먼트 밸리가 가까워질수록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이었다.


3.

모뉴먼트밸리 입구에 도착하니 작은 교차로가 하나 나왔다. 오른편으로 가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모뉴먼트 밸리와 더뷰 호텔로 갈 수 있다. 왼편으로 가면 내가 예약한 굴딩스 롯지가 있는 길이다.


이 교차로를 중심으로 이곳에서 묵을 수 있는 호텔만 있을 뿐 길 위에는 흔한 상점가도, 레스토랑도, 카페도 없었다. 더뷰 호텔과 굴딩스호텔 중심으로 투숙객을 위한 상권이 형성돼 있을 뿐이었다.


문명과 자본을 멀리하는 나바호 원주민들이 지배하는 나바호자치국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관광단지만 개발하고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 보존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모뉴먼트밸리는 인디언들의 전통적, 종교적 의미가 커 정체성의 중심지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전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모뉴먼트밸리가 나바호자치국 소관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그랜드캐년이나 자이언캐년처럼 투어 버스가 다녔을 것이다. 혹은 아치스국립공원처럼 사람들이 차로 쉽게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깨끗하게 닦아놨을지도 모른다. 관광객이 북적이는 모뉴먼트밸리라니, 상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4.

그랜드 서클 여행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이지만 가장 닿기 힘든 곳. 관광객 입장에서는 여행하기 불편한 곳이다 보니 극성수기라는 6월의 어느 토요일에 방문했음에도 다른 곳만큼 사람이 없어 휑한 느낌을 받았다. 주변에 큰 도시가 없는 데다 경비행기나 차가 아니면 마땅한 교통편도 없어서 단체 관광객은커녕 로드트립이 아니면 가기 어려운 극악의 조건이다.

5.

모뉴먼트밸리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더뷰 호텔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다. 모뉴먼트 밸리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더뷰 호텔은 이름만큼 뷰 하나만으로 투숙객의 만족도를 만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사기캐' 같은 호텔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더뷰 호텔을 예약하려 했으나 이미 예약이 끝난 상황이라 2순위인 굴딩스 롯지를 예약했다.


모뉴먼트밸리 내부에 위치한 더뷰 호텔과 달리 굴딩스 롯지는 그보다 5분여 떨어진 곳에 있다. 더뷰 호텔만큼 가까운 뷰는 당연히 아니지만, 굴딩스 롯지에서는 멀리에서 바라본 모뉴먼트 밸리의 전경과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방마다 마련된 테라스에서 보는 뷰가 일품이라 더운 날씨를 뚫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방구석에서 사막의 대낮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영화 '역마차'를 찍은 존 포드John Ford 감독이 모뉴먼트밸리에서 서 있는 모습


6.

1920년대 이곳에 굴딩스 롯지를 지은 해리 굴딩(Harry Goulding)에 대한 일화는 흥미롭다. 모뉴먼트 밸리로 이주한 굴딩은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몰린 나바호족을 돕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직접 가서 영화감독 존 포드(John Ford)를 찾아간다.


굴딩은 직접 찍은 모뉴먼트 밸리의 사진을 보여주며 매력적인 장소임을 어필했고 직접 숙소도 제공하겠다고 하며 존 포드 감독을 설득한다. 존 포드 감독은 이곳에서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상 첫 서부극 역마차(Stagecoach)를 찍게 된다. 이후 굴딩스롯지는 수십 편의 서부 영화 제작의 중심지가 됐다.


현재 굴딩스 롯지에는 당시 영화 세트와 사진 기록, 소품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서부극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 존 웨인의 숙소도 보존 중이다. 숙소 한 건물에서는 극장을 운영 중인데, 오랜 서부극을 매일 저녁마다 투숙객을 위해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굴딩스롯지 숙소에서 바라본 모뉴먼트 밸리

7.

모뉴먼트 밸리 내부를 돌아보는 데 2가지 방법이 있다. 직접 차를 끌고 오프로드를 돌며 유명한 바위를 도는 방법, 또 하나는 나바호 원주민이 운영하는 지프 투어를 등록하는 방법이다. 직접 차를 끌고 다니는 방법은 입장료 외에 추가적인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거친 오프로드를 달려야 해 SUV 차량이 아니라면 권하고 싶지 않다. 사막 내부에 도로 표시도 러프하게 되어있어 길 찾기가 어려워 보였고 모래와 돌만으로 이뤄진 거친 길이 정말 많았다.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원주민 투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원주민 투어에 등록하면 원주민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볼 수 있는 풍경이 훨씬 많다. 특히 모뉴먼트 밸리의 성지인 토템폴totem pole과 Ear of wind 같은 곳은 원주민의 가이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8.

내가 예약한 투어는 일몰 투어였다. 대낮에 하는 투어는 너무 더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5시에 모여서 8시에 해산하는 일정인데, 해가 지는 시간이 8시 30분 정도였으니 투어 중에도 사막 안에서 해가 지는 모습은 사실상 볼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좋은 일몰 포인트는 더뷰 호텔 앞이니, 투어가 끝나면 일몰을 즐기면 돼 문제는 없었다.


9.

지프차를 타고 5팀 정도가 다녔다. 한 팀은 벨기에에서 온 커플, 한 팀은 인도인 4인 가족, 한 팀은 홀로 온 미국인, 한 팀은 우리 부부였다. 투어를 다니면 구경하기 좋은 여러 포인트에서 내려주는데, 우리는 인도인 가족과 친해져 매 포인트마다 사진을 찍어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0.

Diné (디네)는 나바호족 자신을 부르는 말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넘어 자신이 사는 땅과 조상과 영혼이 연결돼 있다는 철학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다. 땅과 조상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인만큼 크고 작은 바위에는 제 마다 이름이 붙어있고 신화가 담겨있다.


손모아 장갑처럼 생겼다 해 이름이 붙여진 미튼Mitten은 모뉴먼트 밸리의 아이콘이다. 더뷰 호텔에서 정면으로 볼 수 있는 뮤가 바로 미튼 뷰다.


투어를 하다 보면 꼭대기가 넓고 평평한 고원 형태의 바위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를 Mesa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로 '식탁'을 의미한다. 미국 남서부 지역을 탐험하는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붙어진 스페인식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11.

세 자매 Three Sisters 바위는 세 자매가 부족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람신에게 제물로 바쳐져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12.

바위에 남아있는 얼굴이 ET를 닮았다. 나바호 가이드가 ET 인형을 가져와 비교해 줘서 투어 하는 사람들끼리 한참 웃었다. 당연히 ET 바위의 정식 명칭은 없다. 유머러스한 가이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이름이다.


13.

나바호 가이드는 투어 중간중간 나바호 원주민에 대한 특성에 대해 설명해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나바호는 생일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 삶은 일직선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과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이어지는 순환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다 보니 생일을 쇠지 않는다는 것이다.


14.

나바호 가이드는 매번 사진 찍는 스팟에 사람들을 내려줄 때마다 '몇 시까지 오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몇 분 정도인지 궁금해 직접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정해진 시간이란 건 없어요. 내키면 돌아오면 됩니다."


자연을 섬기는 나바호 원주민의 시간관 앞에 나는 점처럼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초를 나눠가며 사는 속 좁은 도시인이 자연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 이들의 넓고 분방한 세계관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15.

투어 후반부에는 나바호 가이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제한 구역에 들어간다.


이 삭막한 사막에도 비는 내린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렸다는데 유독 이 지역은 물이 고이는 지역이라 간헐적으로 호수가 생긴다고 한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고 한다.


14.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Ear of wind. 바람의 귀라는 뜻인데, 아치의 구멍 모양이 마치 커다란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람의 풍화작용만으로 형성된 지형인데, 나바호족 전통에서는 바람을 통해 신들과 조상들의 메시지를 듣는 장소라고 한다.

15.

3시간여 오프로드를 달린 지프 트럭 때문에 엉덩이의 감각이 무뎌질 때쯤, 마지막 장소인 토템폴에 도착했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하나의 거대한 돌기둥으로, 북미 원주민의 토템 기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메사(mesa)나 버트(butte)의 일부였지만 수백만년 동안 바람과 비에 의해 주변이 침식되고, 가장 단단한 중심부만 남아 현재의 모습이 남았고 한다.


1975년에 나왔던 영화 '아이거 빙벽The Eiger Sanction'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Totem Pole을 맨손으로 등반하는 장면이 있다. 이스트우드는 실제 등산 전문가들과 이 바위를 등반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영화처럼 가장 위에서 전망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신성한 토템폴을 두고 어떻게 일반인 등반이 가능했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례는 나바호 정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유일한 등반 사례였다고 한다. 단순한 영화 제작 요청으로만 얻어진 게 아니다. 특별한 조건과 교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작사 측은 토템폴을 등반해 영화를 찍게 해 주면 촬영 후 쓰레기 및 등산 장비 등 수십 년간 쌓인 모든 인간 흔적을 완전히 치우고 복원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제작진은 예전 등산객들이 남긴 암벽 등반 용 못(piton)이나 로프, 마킹 등을 제거했다고 한다. 이 사례를 전후로 토템폴을 등반한 사례는 없다.

16.

투어를 끝내고 다시 입구로 돌아가는 길, 나바호 가이드는 본인들의 노래를 들려준다. 나바호 언어라 어떤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연이 주신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투어 하차 지점인 더뷰 호텔에서 인도인 가족과 가이드에게 안녕을 전하고 돌아섰더니 마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하루를 보내면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물러난다.


노을은 순식간에 미튼과 메사를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모든 자연이 고요했다. 저 밑에서 오프로드를 빠져나오는 차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긴 했지만 거대한 사막의 침묵을 뚫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모두가 말이 없었다.

17.

다음날 일출은 굴딩스 롯지에서 맞았다. 전날 더뷰 호텔 앞에서 일몰을 봤기에, 멀리서 바라본 일출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어제의 그 해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순간 모뉴먼트 밸리의 경계가 빨갛게 익었다. 멀리서 지켜본 바위들은 어느 거대한 궁전처럼 보였다.

18.

다음 행선지 모압Moab으로 떠나는 163번 도로에서 또 한 번 모뉴먼트 밸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백미러로 비춰보니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그곳이다. 3년 넘게 미국 전역을 달려온 포레스트가 뛰기를 멈춘 지점. 그는 이곳에서 집에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교차로 길 하나뿐인 모뉴먼트 밸리에서, 인생의 방향성을 찾은 포레스트. 삶은 복잡하지만 단순하고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나뿐임을.






그랜드서클 로드트립 여행 TIP.

- 모뉴먼트밸리에서는 더뷰 호텔, 굴딩스 롯지 위주로 숙소를 알아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하계에는 나바호 원주민이 운영하는 일출/일몰 투어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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