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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 옆에 또 아치 그 옆에 또 아치

모뉴먼트 밸리→ 모압(240km, 3시간)

by Tatte
보스턴→라스베이거스→세도나→플래그스태프→그랜드캐년→페이지(Horseshoe Bend, Antelope Canyon)→모뉴먼트 밸리→ 모압(Arches NP)→브라이스캐년시티(Bryce Canyon NP)→스프링데일(Zion Canyon NP)→라스베이거스→보스턴

애리조나주와 유타주의 경계에 있는 모뉴먼트 밸리를 넘어 유타주 한복판으로 향한다. 이날의 종착지는 모압Moab이라는 도시다. 모압은 유타주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다. 도심에서 얼마지 않아 아치스국립공원이 있고, 40분 거리에 캐년렌즈 국립공원이 있다.


유명한 두 국립공원과 붙어있는 까닭에 사시사철 관광객이 모인다. 모압 다운타운에는 각종 음식점과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기념품 상점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도시에 들어서기 전부터 모압 주변부는 심상치 않았다. 천연 석회암 아치가 2000여개 모여있다는 아치스국립공원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US-191 국도에서부터 대형 아치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이 만든 장관 앞에서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멈춰 선 곳은 윌슨 아치로 폭 28m, 높이 14m에 달하는 대형 아치다.


모뉴먼트밸리 제한구역에 들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봤던 이어오브윈드Ear Of Wind 같은 아치들이 길 중간중간 널브러져 있다니. 이때의 감정은 황당함이 컸다.


아치스 국립공원은 유료이지만 국립공원 밖에 있는 아치들은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모압 근처에 또 다른 무료 아치 트레일이 있다고 해서 해가 지기 전 방문했다. 코로나 아치Corona Arch 트레일이다. 국립공원 밖에 있는 아치라 큰 기대감은 없었지만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덜 붐비고, 적당한 난이도의 트레일이라고 해 가벼운 마음으로 들려봤다.


웬걸.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속에 그늘 하나 없는 돌 길을 한참을 걸어도 아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속을 하염없이 걸으니 바닥을 보이는 물통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황량한 사막 돌길 위에는 사람도 우리 외엔 없었다. 길을 잃으면 안 된다는 긴장감 속에 길을 걸었다. 돌바닥 위에 간헐적으로 아치로 가는 화살표 표시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해 다른 길을 간다면 무더위에 무방비로 갇힐 수 있다.


30여분 돌길을 걷다 보니 낮은 절벽이 하나 나왔다. 다행히 사다리와 로프로 연결돼 있어 손쉽게 오를 수 있다. 이 절벽이 그나마 이 트레일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지점인데 이 지점만 잘 지나가면 아치를 만날 수 있다.


더위라는 공포와 싸우며 만난 코로나 아치는 예상외로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코가 긴 코끼리처럼 길고 예쁜 곡선을 자랑하는 코로나 아치는 높이가 약 33m에 이른다.


아치 바로 밑까지 가볼까 했지만 멀리서 보는 아치의 풍경이 더 멋있을 것 같아 더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아치스국립공원은 주차장이 혼잡하기도 하고 자연보호를 위해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사전에 통과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우리는 오전 9시로 예약한 상황이었지만 전날 코로나 아치에서 느낀 무더위에 교훈을 얻어 오픈런하기로 했다. 아치스국립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아치인 델리케이트 아치Delicate Arch를 보려면 한 시간 넘게 트레일을 걸어야 하는데 한참 더워지는 시간에 가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아치스국립공원은 새벽 7시 전에 도착하면 시간을 예약하지 않아도 입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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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스 국립공원은 차를 타고 매 포인트를 이동해야 한다. 포인트가 너무 많고 트레일 난이도도 다양하다 보니 각자의 취향에 따라 코스를 짜야한다.


우리의 경우 <델리케이트 아치→랜드스케이프 아치(데빌스가든 트레일)→샌드듄 아치→노스&사우스 윈도우즈>를 차례로 돌며 주요한 랜드마크를 하나씩 보기로 했다.

국립공원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랜드마크 밸런스드 락은 굳이 차를 세워 보지 않고 스쳐 지나가며 봤다. 새벽부터 입장한 차들 대부분이 델리케이트 아치로 향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이미 델리케이트 아치 트레일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했다. 국립공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이나 장비를 제대로 챙겨 다니더라. 이른 시간이라 26~27도 정도의 날씨였지만, 한두 시간 내 이곳 기온은 순식간에 30도 중반까지 치솟는다. 난이도는 중급이지만 왕복 4.8km의 트레일 코스이기에 물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평탄한 길이 이어지던 트레일은 어느새 가파른 경사가 있는 돌 산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무도 없으니 그늘도 없다. 무작정 해를 맞으며 올라가다 보면 숨이 차서 말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30분간 돌 산을 오르다 보면 아슬아슬한 절벽길이 하나 나온다. 좁은 길이라 무섭긴 하지만 이곳이 나왔다는 건 델리케이트 아치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벽을 따라 걷다가 나오는 코너 길만 돌면 극적으로 아치가 나온다.

마침내 아치스국립공원의 얼굴이자 유타주의 상징인 델리케이트 아치에 도착했다. 높이 약 16m의 독립형 아치로, 돌산의 정상에 만들어져 있어 다른 아치들보다 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치 앞에 비스듬히 형성된 거대한 사암 위를 걸으면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델리케이트 아치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그 앞에 사람들은 줄 지어 서있다. 아치가 얼마나 큰 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찍는 이는 수십 미터 밖으로 한참 걸어 나가야 한다.

바람에 맞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델리케이트 아치를 보고 있자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대자연은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한낱 생각이 얼마나 가볍고 하찮은지 알려준다. 힘들게 지나온 더위이지만 거대하고 아름다운 이 아치를 매일 아침 볼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다시 견딜 의향이 있다. 델리케이트 아치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델리케이트 아치 앞에서 멍하니 30여분을 보내고 있으니 슬슬 사람들이 몰려온다. 아치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줄도 점점 길어진다. 뒤늦게 산을 오른 사람들에게 아치를 양보할 시간이 됐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랜드스케이프 아치다. 이름처럼 국립공원의 랜드스케이프를 책임지는 특별한 아치다. 국립공원 지도 팸플릿도 이 아치 사진이 주인공으로 있다.


랜드스케이프 아치는 국립공원 가장 북쪽에 있는 데블스 가든Devils Garden 트레일 주차장에 내려야 한다. 데블스 가든 트레일을 따라 1.3km를 가면 랜드스케이프 아치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치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 국립공원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로로 가장 긴 아치이기 때문이다. 가로길이가 약 93m, 높이 23.6m에 이르는 대형 아치로 중력에도 굴하지 않고 길고 가느다란 아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착해서 보니 자연이 만든 긴 다리bridge 같아 한낮 더위에도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과거에는 저 위를 걸어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국립공원은 아치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공식적으로 아치를 오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과거에는 사암 덩어리였을 텐에 어떻게 저 부분만 저렇게 침식돼 남아있을까. 침식 전의 온전한 모습이 상상될 만큼 랜드스케이프 아치의 자태는 견고했다.

매번 만나는 새로운 아치의 자태에 나는 신이 나서 방방 뛰었는데 배우자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어제부터 아치를 연달아 계속 보니 이제는 새로운 아치를 봐도 감흥이 안 생기는 거다. 거기에 기온까지 올라가면서 체력도,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트레일이 길어지면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아직 국립공원의 절반도 돌지 않았는데 '아치라면 이제 지겹다'며 툴툴 댔다.


아치스 국립공원의 또 다른 랜드마크인 윈도우 트레일에 도착했다. 체력과 인내심이 한계에 다른 배우자는 차에 머물기로 하고 이번엔 나 혼자 가기로 했다.


North Window와 South Window는 나란히 붙어 있어 안경The Spectacl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큰 창문처럼 생긴 두 아치가 나란히 보여야 하는데 트레일 입구에서 아무리 걸어 올라가도 창문 한쪽밖에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알고 보니 트레일과 연결된 아치의 뒤편으로 넘어가야 안경, 창문 모양의 아치가 나란히 보인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아니면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날 많은 관광객들이 왼쪽 아치 앞에서 멈춰 서고 그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치로 넘어간 이는 나뿐이었는데 덕분에 사람 하나 걸리지 않는 깨끗한 윈도우 아치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치스국립공원이 특별했던 이유는 수천 개의 다양한 아치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이들 아치들이 언젠가는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사암 아치들은 바람과 물, 온도 변화, 중력 등 자연적 침식 작용으로 인해 서서히 약해져서 언젠가는 붕괴된다. 실제 랜드스케이프 아치 일부는 1991년에 이미 무너졌고, 월 아치는 2008년 붕괴됐다고 한다.


국립공원에서도 주요 아치에 균열계(crackmeter) 장치를 설치하며 온도·계절 변화에 따라 아치 내부 균열의 정도를 관측하고 있는데, 실제 균열은 매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소멸은 또 다른 탄생이다. 침식은 아치를 붕괴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아치를 생성하기도 한다. 공원은 지형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아치들의 소멸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들 아치는 수천 년은 더 버텨 나보다 오래 이 지구에 남아있을 것임에도 소멸하는 것들을 바라보니 좀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모두 사멸의 길을 걷는 같은 처지이지만 되도록 더 오래, 더 아름답게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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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서클 로드트립 여행 TIP.
- 아치스국립공원은 통행 가능한 차량을 매일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계획했다면 사전에 홈페이지에서 입장 시간을 예약하세요
- 예약하지 못했다면 공식 입장 시간을 제외한 새벽, 오후에 입장 가능합니다.
- 모압 숙소는 Scenic Inn & Suites을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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