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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Oct 31. 2024

수십가지 주장의 야끼토리

분자요리 이후 최근 몇 년간의 파인다이닝 트렌드는 우드파이어 그릴이었다. 말 그대로 장작불에 올린 그릴로만 요리를 한다. 인류가 최초로 고안한 조리법으로 돌아가 보자는 취지였을까. 


독보적인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던 호주 시드니의 파인다이닝 식당 파이어도어(firedoor)의 주방에는 아예 가스레인지가 없다. 오로지 숯불로만 이용해 모든 것을 만든다. 거기서는 펜넬도 굽고, 톳과 오징어도 굽고, 심지어 샐러드도 구워서 낸다. 식전 빵으로 제공되는 사우어도우도 숯불에 구워낸다. 이쯤 되면 숯불 근본주의 식당이라고 해도 반론이 없을 정도.      


정말 숯불로만 조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도 우드파이어 그릴을 표방하는 파인다이닝 식당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추세다. 그래서 먹어봤냐고? 미안, 못 먹어봤다. 이유? 지갑 사정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있겠는가. 한 달 식비를 한 끼에 태울 만큼 부자가 아닌지라 앞으로도 파인다이닝 식당에 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릴우드파이어 식당과 야끼토리 이자카야의 공통점


하지만 나 같은 바비큐 처돌이에게는 야끼토리 전문점이라는 꽤 나쁘지 않은 대안이 존재한다. 숯불을 이용해 재료가 가진 맛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 야끼토리 전문점과 우드파이어 그릴 파인다이닝의 지향점은 사실상 같다. 게다가 조리법 역시 극도로 섬세하다. 닭을 수십 가지 부위로 나눈 뒤 그에 맞는 최적의 조리법을 찾아낸다. 주문한 요리에 어울리는 술을 추천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닭고기만 취급하지 않는다. 가게에 따라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물론 대파와 가지, 명란과 옥수수, 심지어 쌀밥까지 굽는다. 술에 어울리는 재료가 있다면 일단 뭐든 구워주는 셈이다. 하지만 절대 마구잡이로 구워내는 게 아니다. 재료가 다른 만큼 굽는 시간과 굽는 정도 역시 모두 달라야 한다. 셰프의 몸속에 그 모든 감각이 녹아 있다.


내가 야끼토리 전문점을 좋아하는 그저 꿩 대신 닭이라서 만은 아니다. 야끼토리 전문점의 요리들은 상당히 자기주장이 강하다. 어떤 면에서는 단호함마저 느낄 정도다. 조리법이 일견 간단해 보일수록 맛의 차이는 큰 법이다. 게다가 닭의 수십 가지 부위를 취급하는 야끼토리의 특성 때문에 그 차이는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닭고기의 고소한 향을 느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장 양념(츠케다레)를 아예 쓰지 않는 곳이 있는 반면, 대대로 이어온 양념에 모든 것을 거는 가게도 있다. 지방이 많은 닭 목살을 과자처럼 바싹 굽는 곳이 있는가 하면, 먹을 때 지방이 적절히 배어 나오도록 굽기를 조절하는 곳도 있다. 단지 닭을 구웠을 뿐인데 이렇게 맛 차이가 날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해서 정말 맛있는 야끼토리 전문점을 찾고자 한다면, 오랜 시간을 들여 여러 군데를 들러봐야 한다.


일식 이자카야의 카운터석은 하나의 연단


도쿄역 야에스 뒷골목에서 먹은 야끼토리. 부위마다 자기 주장이 강해서 마음에 든다.


자주는 아니지만 나 또한 찾아가는 집이 있다. 힘없이 반쯤 나간 듯한 백열전구가 세네 개쯤 달려있고 그 옆으로 쉴 새 없이 숯불에서 나온 연기가 솟구쳐 올라온다. 그 두 가지 인상에 압도돼 주변의 다른 모습들은 왠지 더 어둡게 보일 정도다. 그 으슥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막 구워진 야끼토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카운터석 바로 앞에서는 셰프가 안주를 굽고 있다. 마치 주방이 무대이고, 나는 바로 앞 객석에 앉은 느낌. 셰프의 눈은 손님을 마주할 때에는 친절하면서도 불 앞에서는 단호하다. 짧은 단막극의 독백을 보는 것 같기도, 급진 정당의 명망가가 연 소규모 토크 콘서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다 구워 낸 안주들을 손님들에게 툭툭 내놓으면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여러분! 닭가슴살은 모름지기 살이 촉촉해야 맛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닭 목살은 이렇게 바싹 구워야 바삭바삭하면서 기름이 잘 배어나옵니다, 여러분! 촉촉한 닭 목살이라니요!”     

나는 그 주장들을 하나하나 경청한다. 시작은 사사미(닭 안심). 안쪽을 살짝 덜 익힌 사사미는 가다랑어포와 고추냉이로 포인트를 줬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이게 근조직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다. 가다랑어포는 심다소 심심할 수 있는 닭가슴살에 감칠맛을 더하고, 고추냉이의 향은 혹여나 있을 날고기의 불쾌한 향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타음 주자는 세세리(닭 목살). 역시 소금으로만 간을 한 뒤 바싹 구워냈다. 그 어떤 기교도 없다. 그저 닭의 지방을 숯에 구워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맛은 내가 이걸 왜 먹어야만 하는지를 바로 납득시킨다. 세세리를 입에 넣으면 '바삭' 하면서 감칠맛 가득한 지방이 배어나온다. 순간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싱싱한 지방은 텁텁하지 않고 어떤 경쾌함까지 느껴진다.


구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그 주장이 좋다!


이 집은 확실히 양념을 보수적으로 쓴다(물론 양념을 쓰는 부위도 있다). 양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아쉬울 수 있지만, 분명 그 덕에 고기의 육즙과 식감, 그리고 숯의 향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를 셰프의 고집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유도나 주문에 가깝다. 자신의 요리로 손님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용기다.


나는 그 단호함이 좋다. 이 가게에서 닭 안심을 먹는 순간, 나 또한 그들의 주장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수십 가지 부위에는 수십 가지의 맛과 수십 가지의 조리법, 그리고 재료를 바라보는 셰프의 수십 가지 해석과 주장이 존재한다. 야끼토리의 세계에선 그 주장들을 원없이 경청할 수 있다. 그 주장에 설득되는 순간, 우리는 그 가게의 열렬한 단골이 된다.


나는 음식 역시 말과 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감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음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기 주장이다. 평소의 생각과 다를지언정 더 많은 이들의 자기주장과 더 많은 설득을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땀으로 얻어낸 지론과 철학은 언제 어디서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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