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처럼 외워버리자.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새벽 다섯 시 트럭의 시동 켜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그 어떤 알람 소리보다 그것은 강렬했다.
어느새 나는 저 트럭과는 달리 동력이 부족해졌다. 연료가 바닥난 것이다. 아무리 행복해지려 발버둥을 쳐도 결국 계속 제자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거봐. 너 다시 그 자리잖아.
누군가 귓가에서 약 올리는 기분이다.
행복은 얼어 죽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일일 줄이야.
다들 행복을 놓치고 살잖아. 너만 왜 이렇게 유난이니? 내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두려움이, 어떤 불안이 너를 돈 없이는 살아도 행복 없이는 못 살게 만드는 거니.
가난했지만 가난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집안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지는 와중에도 우리 세 자매는 배고픈 적이 없었다. 그 가난은 철저히 아버지만의 것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진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껏 돈돈돈 거리며 살지 않는 건 오로지 아빠 덕이다.
어렸을 때 종종 엄마가 밤에 흐느끼는 걸 봤다. 왜였을까. 어린 마음에 이유를 묻는 자체가 왠지 금기 같았다. 그저 어른은 아이처럼 매일 울지는 못해 가끔씩 저렇게 우나, 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에서 연년생을 키우는 젊은 엄마가 그때의 엄마처럼 똑같이 우는 걸 봤다. 본인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고 남편에게 토로했다. 남편은 되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뭐가 어렵냐며 반문했다.
세상에 당연한 일도 없을뿐더러, 각자에게 특히 더 어려운 일은 분명 존재한다.
연년생인 언니 둘을 키우고, 그것도 모자라 그 시절 어느 집이 그랬듯 아들을 낳으려고 낳은 게 또 나였다. 그렇다고 딱히 미움을 받고 살진 않았지만, 엄마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에겐 그저 국어보다 수학을 못하듯, 우리를 키우는 일 자체가 풀지 못할 숙제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를 이해하는 현재의 나와 엄마를 이해 못 하는 과거의 내가 계속 싸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토록 행복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저 나란 사람 자체가 행복이 수학처럼 어려운 사람일까 봐, 그것이 영영 내가 가질 수 없는 영역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딱히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약간의 체념 섞인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이 말이 주는 위로가 꽤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자주 떠올린다. 내가 지금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남들이 생각하는 불행도 굳이 불행으로 삼지 않기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노력조차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 같지만, 그래도 꽤 효과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색하고, 글을 쓰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것도 엄연히 말하면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엄마는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 어떤 유산보다 값진 걸 남겨준 것도 분명하다. 엄마로 인해 불행을 알았지만, 결국 엄마로 인해 불행을 대하는 자세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기어이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미 나를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매일매일 떠올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행복이 수학처럼 어렵다면, 구구단처럼 외워버리자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