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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팅달 Nov 20. 2021

나의 또 다른 엄마, 이모

EP 19. 애틋한 자매 이야기

“언니. 나야. 언니가 앉아계신 거 보니까... 참 좋다...”     


위드 코로나 이후 막내 이모와 함께 엄마에게 면회하러 갔다. 

단 8분이지만,

이모는 면회가 가능 한 날이면 언제나 엄마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오셨다.




엄마보다 여섯 살 아래로 작년에 팔순이셨던 이모는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동생 울지 마. 나 괜찮아...”     


엄마는 이모에게 눈물 닦으라는 손짓을 하셨다.      


“아이고, 언니도 참... 나 운 게 보였어?”

“울지 마. 나도 눈물 나...”     


엄마와 이모는 지금까지 평생을 서로에게 의지하셨다,

같은 동네에서 30년을 넘게 사셨고.

이모가 전도해서 같은 교회를 다니며 영적인 세계도 공유하셨다.

두 자매 권사님의 우애는 교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우 유명했는데.

엄마가 쓰러지시고 나니, 이모는 삶은 나만큼이나 엉망진창이 되셨다.


“언니. 엉덩이 괜찮아? 욕창 때문에 아프지 않아?”

“좋아”     


코로나 방역 때문에 가려진 투명 가림막 너머로 엄마가 이모와 나를 보고 웃어주셨다.     


“언니. 언니가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부르면 대답도 하고, 나 너무 좋아”

“나도... 나도 좋아”



엄마의 일곱 형제자매(맨 왼쪽이 엄마, 왼쪽에서 세번째 막내이모)


엄마는 일곱 남매 중 다섯 째다.

위로 언니 둘과 바로 밑의 여동생, 큰 오빠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다.

92세 작은오빠와 81세인 막내 여동생만 살아서 서로 의지하고 계셨는데,

엄마가 10개월 전에 쓰러지시고 나니, 막내 이모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남편과 자식들이 곁에 있지만, 엄마 같은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 외로움은 더 컸던 것 같다.     


"언니, 나 좀 보셔~”     


언니라고 부르는 소리에,  엄마는 천천히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셨다. (왼쪽 편마비때문에 고개가 100도정도밖에 왼쪽으로 돌릴 수 없다)

이 감동적인 장면에....이모와 나는 박수를 쳤다.      


“언니는 너부대대하고, 난 길쭉이였는데. 이젠 언니도 길쭉이가 됐네.”     


엄마가 살이 많이 빠졌다는 뜻으로 이모는 그렇게 표현했다.  

엄마가 씩 웃으셨다. 앞니가 다 빠져서 더 귀여워지신 엄마.      


“이빨 빠진 늙은 고양이야. 웃기지”

“나야말로 너무 쪼글쪼글 해졌어. 언니 나 많이 늙었지?”

“이뻐. 넌 언제나 이뻤어.”     



열 살 아래로 보일 만큼 젊게 사셨던 이모는 올해 확 늙으셨다.

사람이 충격이 크면 일시적인 기억력 상실이 온다는데,

이모는 치매 일지도 모른다는 소견까지 받으셨다.

엄마의 뇌졸중이 이모에게 어마 무시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엄마는 선교사역을 하느라 결혼도 늦게 하고, 마흔이 넘어 어렵게 날 낳으셨다.   

이모는 바쁜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고자, 어린 나를 따로 서울로 데려다가 키우셨고.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사촌언니오빠와 친형제자매같이 지냈다.

비록 외동이지만 외동 아닌 외동 같이 지내고 있는 건, 모두 두 자매의 헌신 덕이다.     


이모는 엄마가 쓰러지자 절망 가운데 매일 눈물로 사셨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언니도 쓰러졌지

게다가 코로나로 교회도 못 다니지.

활달했던 성격이 점점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셨다     

그러나 오늘부터 이모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엄마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점점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다      


“언니. 빨리 나아서 집으로 와.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예전처럼 살아야지 ”

“그럼 그래야지....”      


병원에 입원에서 10개월만에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온. 

눈에 띄게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진 것을 보고 이모는 삶의 희망을 다시 붙잡게 된 것이다.

며칠 전에는 엄마가 영상통화를 걸어서 얼굴 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뜨지 않았던 핸드폰 발신자에 “언니”가 뜨자 엄청 놀라셨단다.

너무도 바라고 또 바랬던 “언니”라는 단어!

그 단어가 핸드폰에 뜨자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언니. 언니가 전화를 해줘서 얼마나 눈물 났는지 몰라. 오늘은 손 한 번 만져보고 싶어서 왔는데, 이렇게 그냥 가야 하니 너무 아쉽다.”

“나도...”     


‘아’하면 ‘어’하고 알아듣는, 평생을 친구처럼 엄마처럼 남편처럼 의지했던

두 자매의 애틋함은

누가 보더라도 참 아름다웠을 것이다.

엄마는 손을 흔들며, 임시 면회 텐트에서 빠져나가셨다.

휠체어에 앉아 들어왔다 나가시는 모습에 이모와 나는 너무 감사했다.


사람이 앉고 서고 걷고, 또 먹고 스스로 배설한다는 것이

참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엄마를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감사며 은혜였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이제 고개를 들고 앉는데 10개월이 걸렸다.

그다음 단계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모와 나는 희망을 얘기했다.     

 

“누가 그러더라. 사람이 80세까지 건강하게 살면 90점 인생이고.

85세까지도 건강하게 살면 100점 인생이라고.

내 소망은 100점 인생을 사는 거란다.  

우리 언니가 100점이라고 축하해줬는데,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생하는 너한테 너무 미안하구나. 이모가 도움이 못돼서...”          


지금껏 엄마가 쓰러졌어도

이모가 건강하게 계시기 때문에.

외롭지 않게 버틸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처럼 늘 기댔던 이모....

지금처럼 계속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앞으로도 쭈욱 엄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다.

우린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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