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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팅달 Dec 19. 2021

노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삶

EP18. 아버지의 대학노트

2010년. 총신대 평생교육원 신학과 1학년을 다닐 때의 아버지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 안엔 아빠의 어린 시절을 담은 글이 적혀 있었다.

1940년 대의 이야기.

소설을 보듯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정말 글을 잘 쓰셨다.

리포트 제출을 위해 작성하신 것 같은데 꽤 재미가 있어서 올려본다.  






오늘은 부모교육 첫 시간이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정 롱스커트에 금목걸이와 조그만 시계를 오른손에 차고 검정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 선생님이 들어오시었다(2010년 8월 31일). 김은선 교수님이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6살 딸 두 아이의 어머니고, 박사과정 밟고 계시는 일상의 엄마였다.     


“부모교육은 실제와 접목이 필요합니다. 집에 가서 연습하십시오.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또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말이 빠르다. 쉴 새 없이 이어져 줄줄 나왔다.      


“물어보시면 잘 알려드리겠습니다.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시간이 부족하지만 시간의 싸움입니다. 성실히 하면 점수 나옵니다. 출석 잘하고 조퇴하지 말고 중간시험을 집에서 해옵니다.”     


과제물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 과정. 어린 시절의 나였다.

초등학교의 어린 시절을 교수님께서 깨워주셔서 적어본다.

주님의 구원하심과 감사함을 기도했다 아멘



          

▶어린 시절(1937-1944)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엄마. 누나. 나 이렇게 여객선을 타고서 외갓집에 간 기억이 생생하였다.

통영에 큰외삼촌이 있었다. 통영 바다 밑 터널 길을 걸은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순천에 근무할 때 도립병원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 너무나 무서웠다.

그리고 어린 친구들과 산에 갔는데, 산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공동묘지가 너무나 무서웠다.

 

    

▶국민학교 1학년(1944.8월)


아버지가 전남 보성군청으로 전근 왔다. 나는 보성 국민학교에 다녔다.

요즘은 쌀을 쌓을 창고가 없을 정도로 풍년인데, 그땐 태평양전쟁 중이라 쌀이 귀했다.

우리 집에는 누나, 나 그리고 동생... 다섯 식구였다. 매일 같이 시래기죽이 끼니였다.

어린 나이에 죽이 먹기가 싫어서 부엌에 가서 벽을 매일같이 차기 시작했다.

얼마나 찼던지 시일이 흘러 대나무를 엮어 씌운 흙벽에 구멍이 뚫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었다.

 

학교 미술 시간에 영국기가 그려진 비행기와 일본기가 그려진 비행기가 날아가 싸운 것을 그렸다.

바다의 군함끼리도 싸우는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은 일본 군함이 이기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또 틈만 있으면 학생들은 솔방울 줍기와 소나무 관솔을 따는 일에 동원됐다.



▶고향 함남 고원으로 가는 길(1944)


우리 집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굶기는 것을 애처로워했다.

고향 함경남도 고원에 가면 농사를 지으니 그곳으로 보내서 먹게 하실 생각이었나 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데리고 아버지가 가운데 우리 형제를 양쪽에 앉혀서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 나 동생은 까까머리였다.


드디어 아버지의 결심이 있어 엄마와 누나와 헤어져 우리는 보성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주 먼 고향 함경도 고원읍 군내면 상사창리(경원선 종점)로 떠났다. 나는 9살 동생은 6살이다.

그래도 나는 유치원을 다니고 국민학교 1학년 다니었기에 좀 의사소통과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우선 경성까지 가는 도중 상하행선 교차지점에서 좀 쉬는 시간 있어서 밖에도 나가 보았다.

그때는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고, 역장이 기를 가지고 나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밤이 새도록 달려 경성역에 도착하였다. 내려서 세수를 하며 쉬고. 다시 경원선을 갈아탔다.


기관차가 석탄 차여서 높은 비탈길을 오를 때는 힘들어했다.

철원 평야를 지나 안변을 지날 때, 기차는 절벽 위를 가고 높은 산의 경치는 지금도 생각하면 얼마나 그림 같은 울긋불긋 색깔이었는지. 아름다운 경치였다.     

 


▶ 나의 고향집(1944-48)


드디어 아버지의 고향집에 도착했다.

고향 집은 뒤에는 높은 산이 떡 버티고 있고, 언덕에 올라서 멀리 보면 큰 강이 고원읍 쪽으로 흘러간다.

더 멀리는 기찻길이 있어서 그림처럼 기차가 지나갔다.

그 기차는 고원에서 평양으로 가는 ‘평라선’ 열차였다.

고원읍을 지나서 쭉 내려가면 천내리 시멘트 공장이 있고,

그 옆 영흥에는 좋은 흑연이 많이 나서 연필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나 또래의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때. 돌을 많이 주워서 공기 치기. 땅뺏기 등을 하였다.

땅에 하얗게 그려지는 돌이 많았다. 그 돌은 곱돌이었다.



안채로 기와집이고 바깥채는 초가집이었다.

대문을 나가면 큰 마당이 있어 농사지은 벼가리 콩가리를 등을 높이 해놓았다.

소외양간. 넓은 마당과 마당의 주위에는 앵두나무 등 과일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은 논이 있고, 오른쪽은 밭이 있는데 언덕배기에는 큰 밤나무가 있었다.

고향집 동네는 우리 이천서씨만 모여 사는 동네였다.


할머니와 큰어머니 작은 어머니의 어른들이 계셨고,

나의 위에 형과 누나 남동생 여동생이 있었다.

형은 24살의 청년이지만 늘 몸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말인즉 어렸을 적에 크게 넘어져 오른발의 골절이 있었으나,

속히 치료를 하지 않아 10년 이상을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형은 붓글씨를 늘 쓰곤 하였다. 형의 방에는 잘 쓴 한문자들이 걸려있었는데,

그건 할아버지가 쓰신 글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글을 받기 위해 멀리서도 왔다고 하는 명필가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 남자는 형. 나, 동생 이렇게 셋이었지만 농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제일 하기 싫은 것이 내 차지다.

가을에는 논에 이삭 줍기. 사방으로 튀어 있어 마당의 콩을 일일이 줍기였다.

어느덧 나도 커가니까 우리 집에 암소가 한 마리 있었다.

처음에는 집 주위에서 소 끌고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기다 어느덧 소를 탈 수 있게 되자

소를 몰고 친구들과 멀리 산으로 강으로 가서 소를 먹이고 하였다.     


▶광복 8월 15일(1945)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우리나라도 해방을 맞이하였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길가로 식구들을 따라 뛰쳐나갔다.

고원군이 군청 소재지여서 사람들은 경찰서로 뛰어갔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억울함을 많이 당하였으면 경찰서부터 쫓아갔을까 생각한다.

일본 순사들이 성난 사람들 속에 갇혀서 뭇매를 맞고 있었다.

나의 나이가 겨우 9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일본 사람들의 큰집들은 전부 부서지고 일본인은 안보였다.

해방된 날 8월 15일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전라도 개똥새


학교에 가면 학우가 되고, 동네에서도 친구가 되고, 촌수를 따져도 친척이 되는 아이들이 있었다.

또래 애들이 학교에서도 전라도 개똥새라고 놀려대었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였으니 나의 어린 마음속에는 개똥새라는 말이 못이 박혔다.  

어린 나이에 누구에게도 속시원이 말을 하고, 속상한 일을 들어줄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가 내 곁에 없었다.

꿈만 같이 아주 먼 곳이었고 갈 수도 없는 전라도 보성에 계셨기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학질


그해 여름에 하루걸이에 걸렸다.

열이 나고 헛소리하고 헛것이 보이고 하였다.

하루는 멀쩡하고 그 다음날 앓는 그런 병이었다.

학질인데 진짜 악질병에 걸린 것이다.

앓아누웠을 때 분명히 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오는데, 헛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병이 낫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웃 형이 미역감으러 가자고 강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은 강물을 큰 모터로 푸는 곳이었다. 깊이도 있지만 강물을 떠올리는 수로가 넓고 깊었다.

헤엄을 배우지 않아서 수영도 못하지만 따라갔다.

형은 물 나오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갑자기 사정없이 깊은 물속으로 떠밀어 버렸다.

나는 진짜 깜짝 놀라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물도 많이 먹고, 가라앉을 찰나였다.

그때 형이 나를 건져주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형은 웃고 있었다.


“인제는 하루 걸이가 떨어져 나갔다” 했고,

나의 놀램과 동시에 학질이 떨어져 나갔다.

민간요법치고는 사람 죽이는 치료였지만 그 후로 하루걸이는 씻은 듯이 나았다.



▶ 논길을 걸으며(1945년 이후)


우리 집 대문을 나와서 남쪽으로 20리 길을 걸으면 내가 다니는 국만학교가 있었다.

학교를 오며 가며 나는 우리 집 논길을 걸으며 다녔다.

우리 집 뒤와 옆에는 논이 있었다. 논길은 리어카와 소달구지가 다니는 길이었다.

봄에는 논에 자운영이 예쁜 꽃을 피운다.

논이 붉은 꽃으로 되었을 때는 참 아름다웠다.


어느덧 꿀이 질 때는 우리 집 소가 쟁이로 논을 갈았다.

그 한편에는 벼 못자리를 만들었다.

모가 파랗게 자랐다. 그리고 논 써레로 갈아서 평평하게 하였다.

나는 어렸으므로 모를 심을 때 모를 심기 좋게 논에 들어가서 편리하게 직접 날라주었다.


 


그리고 일일이 표시점에 모를 심었다.

처음은 서툴렀지만 점점 나아졌다.

또 산자락에 논에도 모를 심었다.

산자락 논은 우리집 산이어서 여름에는 소 몰고 또는 타고서 친구들과 함께 산에 소를 풀어서 먹였다.

내려올 때는 소꼴을 베어서 소에 싣고, 나도 타고 하여 집으로 간다.

뜨거운 여름이 오면 논에 벼는 무럭무럭 자라서 논을 매고.

가을이 되면 온 논은 누렇게 물결을 이루는 황금벌판이 되었다.

어린 나는 벼 베는 것을 배웠고 열심히 가을걷이를 하였다.


봄엔 벌판 같은 논을,

여름엔 푸른 물결의 논을 바라보며 걸었다.

가을의 논은 황금물결이다.

겨울의 논은 눈 덮인 고인 물. 난 그 안에서 얼음 치기 팽이치기를 하면서 놀았다.

온 산과 강이 눈 덮이면 운동장 같았다. 축구를 재미있게 하고 뛰어다녔다.

내 고향 상사창리는 어린 동심의 세계이었다.     


나의 고향은 멀리 있는 꿈같은 땅이다.

이제 6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가볼 수 없는 땅이다.

세계 어디든 다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내 고향은 갈 수 없는 그리운 고향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분명히 고향에 가서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날을 꼭 이뤄주실 것을 믿는다.


10월 1일 이산가족상봉이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리기로 합의됐다는

뉴스와 기자 인터뷰를 듣고 너무 기뻤다.

사실 나의 경우도 사촌 누님. 여동생이 고향 땅에 있는데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산가족들이 좀 더 폭넓게 자유롭게 만남이 이어가길 희망한다

(제18차 이산가족 상봉: 2010년 10월 30일~ 11월 5일)      


*아빠는 1948년 할아버지가 자리를 옮기시면서, 전남 광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중학교 시절 아빠의 사진


▶ 교회 사역


오랜만에 옛날 초창기 초신임 시절의 개척교회 사역을 주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적는다.

1964년 10월경 울산 방어진 시골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울산에 공업단지가 만들어지고,

울산에 정유공장과 화학공장이 막 들어섰을 때였고.

먼지 나는 자갈 도로였다.


지금은 방어진 입구에 염포 울산 현대자동차, 더 가서 미포에 현대조선소, 더 가서 전하에 현대조선!

오늘은 이렇게 어마어마 하지만

그때는 현대자동차 자리는 갈대밭이 우거진 염포 포구였고,

미포 조선소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고,

전하 조선소는 모래사장에 해심이 깊었기에 해수욕장도 할 수 없는 바닷가였다.

교회는 방어진읍과 전하리 사이의 일산리에 위치하였고 교회 앞에는 일산동사무소가 있었다.     

교회는 평범한 기와집이었다.


부엌과 방한 칸과 나머지 공간을 만들어 튼튼한 소나무 기둥으로 떠받쳐 예배공간을 만들었다.

빨간 십자가가 표시된 흰 천을 책상에 덮어서 강대상을 만들었다.

마당이 조금 있고 대문 입구에 큰 벚꽃나무가 있었다.

바로 옆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큰 기와집이 있었다

개척된 지 2년 된 교회이고, 내가 3번째 부임한 전도사였다.



젊은 전도사 시절의 아빠모습


교회는 집사님들이 네 분 뿐이고, 반사가 네 분. 그리고 주일 학생이 30여 명쯤 되었다.

말하자면 미자립 시골교회였다.

도저히 전도사 한 사람의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맡겨진 십자가임을 깨닫고,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더 굳건히 먹고 기도하고 주님께 매달렸었다.


우리 교회의 장년 예배는 조용했다.

그러나 주일 학교 예배는 주위에 쨍쨍하게 울렸더랬다.

어느 날 저녁 주일 학교 예배 때.

바로 길 건너 대나무 울타리 집의 할머니가 나와서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를 하였다.

원래 이 고장은 전래 종교이기 때문에 어떻게 설득할 수도 없는 막무가내였다.

그만큼 주일 학교 반사들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반사님들과 주일학교 학생들이 심히 주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2010년 어느 날 43년 만에 반사님과 주일학생(방어진교인)의 전화를 받았다.

만나는 모임에 나갔는데. 반사님은 권사님이 되어 손자를 데리고 오셨고, 주일 학생은 00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장로님이 되어 있었다.

나는 까맣게 몰랐으나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님께 감사하였던 기억이 있다.      



▶ 나의 비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입학을 몇 년 이상 더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나이가 노년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우리 집 사람은 전적으로 나의 신학공부에 반대한다.

열심히 주님을 사모하는 안사람의 신앙은 아마 나보다 앞설 것이나

여러 사람들의 조언도 듣고 종합적 판단을 하여 반대를 하는 가 싶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나의 미완업 학업을 완성하고 싶다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무슨 대가성이 아닌 주님께 대한 나의 감사의 은혜를 표현하는 사역을 하고 싶은 마음은 변치 않았다.

하나뿐인 딸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딸은 지금 방송국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다. 고맙다.  



                   

이 기록들을 옮겨 적으며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생전에 진작 아버지랑 대화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으면 엄청 좋아하셨을텐데....


그래도

아빠가 남겨준 이 글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빠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고, 행복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다.

또 아빠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공부할 수 있게 투덜투덜하면서도 내조해 준 엄마도 존경스러웠다.

두 분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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