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 아버지의 모교에 교과서를 기증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관이 새로 지어지면
아빠의 유품을 전시할 코너를 만들어 주겠노라고...
역사관 담당 실장님께서 약속을 하셨다.
감격스러웠다.
광주제일고가 어떤 학교인가...
올해 101년이 된 역사 깊은 학교가 아닌가.
1929년 국사책에 나오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며.
80년대 민주화에 앞장서 온 학교가 아닌가.
그 학교를... 아빠는 70년 전에 다니셨다.
유명한 정치인과 독립운동가, 기업가들도 많이 배출했고
조정래 소설가, 이청준 작가 등 한국을 빛낸 문학인들도 이 학교 출신이었고
특히 선동열, 이종범, 김병현 등 야구 모르는 나조차도 알 만한 선수들이 활약한
야구의 명문임을 자부하는 학교였다.
이 대단한 학교의 역사관에 아빠의 코너가 만들어질 거라니...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고맙고 감사하고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책장의 맨 안쪽에서
아빠의 고등학교 시절의 낡디 낡은, 언뜻 폐휴지 같이 보이는 책들과 노트를 발견했다.
정말 옛날 고서를 보는 듯했다.
손 때 묻은 누런 책들과 번호를 매긴 검은 노트가 있었다.
이 책들 중에 하나는 내가 초등학교 때 본 적이 있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그림으로 그려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빠가 이 책을 꺼내서 추천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게 1950년대 고3 국어 교과서였다니.... 정말 신기했다.
나 혼자 보기에는 많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 측에 전화를 걸어봤다.
유명한 학교라고 하니 역사관 정도는 있겠지...
만약 이 책과 노트를 안 받아준다면 그냥 나만 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연락을 해봤다.
아빠는 광주서중을 32회로 졸업하고, 광주일고를 2회로 졸업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졸업앨범과 고등학교 국영수 교과서, 영어사전과 옥편, 필기 노트를 고이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립고 좋았으면, 70년을 가지고 계셨을까?
아빠의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꼼꼼하게 정리된 고2 시절의 노트는
아빠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공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고2가 된 내 딸에게 아빠의 노트를 보여줬다.
손녀의 입에서도 “대박~” 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글씨도 너무 예쁘고,
전 과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과정이 많이 달라진 건 아닌 듯싶다.
딸과 나는 연신 “우와~최고야~대박” 등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3년 터울로, 광주서중 35회, 광주일고 5회 졸업생인 작은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섯 동생들이 교과서를 구입하지 못해 공부를 포기할까 봐
아빠는 손수 열심히 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총 6권의 노트가 있었는데, 막내 고모까지 그걸로 공부했다고 하셨다.
하시며 아빠가 얼마나 모범생이었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자랑스러웠다.
아빠도 생전에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를 자주 하셨다.
치열하게 공부하느라, 잠도 잘 못 자면서, 이 대한민국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했었다고.
알만 했다.
아빠의 그 고집은 아무도 못 말렸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 고집을 못 말렸으니, 엄마도 나도 그 고집은 진짜 못 꺾었다.
고집불통 노인이라고 엄마가 푸념했던 때를 생각하니
크크크 웃음이 났다.
아빠는 우리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전도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 젊음을 다 바쳐서, 시골교회 전도사로 20년을 넘게 사셨던 거겠지...
열 세 곳의 교회를 벽돌로 쌓아가며 성전을 지으셨는데.
아깝게도 지금은 충주호 밑에 잠겨버린 한수라는 곳이라서
더 이상은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산골마을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는 것이 안타까워 야학을 여셨다고 했다.
아빠는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재작년 즈음인가 그 학생들이 할아버지가 되어서 아빠를 찾아왔었다.
아빠의 연락처를 찾느라 몇 년이 걸렸는데, 수소문 끝에 결국 알아내서 찾아오신 거라 했다.
그 시절에 밥이 없어서
몇날 며칠을 굶으며 금식했는데,
지금은 세 끼 밥을 다 먹고 사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웃었던 아빠의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니... 눈물이 난다.
작년에 아빠가 뜬금없이 광주일고를 가보고 싶다고 하셨었다.
100주년이 되었다는데,
다시 한번 내가 공부했던 학교를 가보고 싶다고...
난 바쁘니까 나중에 가자고 했었는데....
아빠는 이제 안 계시고...
아빠 대신 나와 외손녀인 내 딸만
아빠의 그 영광을 대신 받게 되었다.
역사관 실장님이 나오셔서, 친절하게 아버지 유품을 기증받아 주셨다.
한문으로 길게 적힌 문서들이 있었는데, 도통 무슨 내용인지 몰라서 물어보았다.
실장님은 70년이 넘도록 어떻게 이런 서류들을 가지고 계셨냐면서,
광주제일고의 귀중한 역사이며,
6.25 전쟁 이후의 교육부에 중요한 자료가 될 거라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셨다.
이 얘기를 아빠가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천국에서 아빠는 이미 이 모든 걸 알고 계시겠지?
돌아오는 길에 광주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고2 딸 앞에서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다고 울었다.
마흔이 넘은 아줌마가 길거리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고2 딸은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그동안 보여왔던 나의 패턴임을 알고, 급히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려줬다.
그래... 맞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 이젠 역사의 기록이 되었는데. 왜 내가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광주제일고에 기증한 책들 말고도, 아빠가 남긴 기록은 굉장히 많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아빠였는데.
20대부터 썼던 일기들, 가족들과 오갔던 편지들, 선교본부와 주고받은 회계장부들,
그리고 엄마와 주고받았던 몇 안 되는 연애편지. 내가 태어났을 때 썼던 일기 등등
여러 날을 밤새우며 그 내용들을 읽어보았다.
아빠도 한 때 미래가 촉망된 청년이었고, 자신의 신념대로 인생을 걸어왔던 분이셨다.
그 굳건한 신념이 흔들릴 때,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셨지만.
이 막대한 양의 편지와 일기, 자료들을 읽어보면서
아빠가 왜 그러셨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록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아빠와 엄마의 나이가 될 것이다.
내가 부모님을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듯.
나 또한 딸에게 부족하지만 흠이 되지 않는 부모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다시 한번 아버지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