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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06. 2021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1882년 6월 1일~2일


몇 년 전 가을, 친구와 통영으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통영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름빛으로 따뜻한 날씨였다. 항구에 배들이 가득했고 짭짤한 바다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우리는 유명하다는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통영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사람들에 휩쓸려 걷던 중, 지친 마음에 무작정 샛길로 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예정에 없던 길을 통해 한적한 공원에 도착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그러게 말이야, 이제 좀 살겠다. 초가을 낮, 조용한 햇빛을 받으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아직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던 그 시절. 앞으로 뭐하면서 살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나이는 들어가는데 뭐 하나 선명한 게 보이지 않던 나날들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어? 그때,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이런 조그만 도시에 있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싶을 때가 있어.

창 밖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면서

우편물에 도장을 쾅쾅 찍는 일. 

별다른 걱정 없이 소소하게 사는 거.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나는 친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거창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친구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 설렘이 언뜻 스쳤다. 내가 아무 말 없자 친구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평범하게 사는 게 내 꿈이야. 보통처럼 사는 거. 그때 나는 솔직히 '정말 그게 꿈일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너무 소극적인 목표는 아닐까? 몇 년이 지난 지금, 친구는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 잘 살고 있다(소도시의 우체국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남자 친구를 만나 올해 결혼을 앞두고 있다.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흐의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 속에도 드러난다. 고흐는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테마는 바로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 짐을 옮기는 농촌 여인들, 복권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 함께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 1885년 작품인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가 말하는 평범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누추해 보이는 농가에서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노란 불빛이 집을 밝히고 있다. 소박하게 차려입은 이들이 이제 막 삶은 감자와 따뜻한 차를 마시려 하고 있다. 서로에게 먼저 음식을 권하는 모습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시골 마을의 저녁 풍경이다. 



이 작품 속에는 고흐가 그린 다른 그림 속에서 보이는 쨍한 파랑, 불타는 노랑, 푸른 하늘과 붉은 꽃들과 같은 색채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당대 활동했던 어느 화가는 고흐의 이 그림을 보고 너무 지저분한 색깔을 사용했다는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아꼈다. 다른 작품들보다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훗날 고흐가 여동생에게 했던 말은 그가 얼마나 이 그림에 애착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내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거야."



과연 그의 이야기대로 되었을까. 아쉽지만 사람들은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 <자화상>, <별이 빛나는 밤>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에 관한 것이라면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고흐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이 숭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한 모습, 부풀려지고 멋있게 각색된 모습을 마치 진짜인양 자랑하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현대 사회에서 고흐의 그런 생각은 쉽게 무시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진정성 있는 것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가짜로 만들어낸 아름다움과는 격이 다르다. 




가끔 친구와의 통영 여행을 돌아보곤 한다. 그곳엔 반짝거려야만 좋은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있다. 나는 언제 내게 올지 모를 멋지고 근사한 케이크를 기다리며 눈 앞의 조각 케이크는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배워가고 있다. 평범한 것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님을. 고흐의 말처럼 어쩌면 평범한 것이 숭고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부터는 작지만 지금 내가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천천히 맛보는 여유를 부리려고 한다.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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