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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gry Traveller Mar 16. 2021

0. 프롤로그

감옥에 무도회가 열렸다 0

프롤로그 


계피 향수를 쓰는 그녀는 구제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

막 시금치 뚜껑을 딴 뽀빠이가 윙크를 하고 서 있는 그녀의 낡은 티셔츠가 예쁘다.

그녀의 늘 내가 갖고 싶던 타입의 옷들만 입고 있다.

마분지처럼 빳빳한 일본산 구제 청바지에 물이 빠진 검정 바탕에 뽀빠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선 여자가 내 남편의 첫 출근을 축하하며 인터폰을 향해 하얀 거품을 뿌려댄다.


“축하한다!”


‘축하해’ 도 아니고 ‘축하해요’ 도 아닌, 그저 ‘축하한다!’

약간 딱딱하면서도 건조한 말투. 구제와 어울리는 그녀의 말투다. 나는 그녀의 말투가 샴페인의 새하얀 거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투가 너무 냉정하고 형식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말투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슬쩍 가미가 된 말투라는 것을 안다. 만약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축하한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녀가 정말 축하하러 온 것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것이 뻔하다. 남편은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어가 있는 그녀의 말투를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하얀 거품을 토해 냄과 동시에 샴페인 주둥이가 빙빙 돌며 내 눈 속을 부신다. 내가 살짝 눈을 비비대고 있을 때, 남편은 그녀와 샴페인 병으로 가득 찬 인터폰 화면에 손바닥을 대고 활짝 웃고 있다. 나는 이제 남편의 등 뒤로 서서, 남편이 검지로 빨간 버튼을 눌러 그녀에게 대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반쯤 비워진 샴페인 병을 들고 현관문으로 들어선다. 내 코는 그녀의 출현과 함께 계피 향을 맡는다. 남편은 그녀가 내민 샴페인 한 모금으로 아침 입술을 살짝 적시더니 내 앞에서 당당하게 그녀에게 안긴다. 그녀는 남편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고는 남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다. 나는 갑자기 갈증을 느끼며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한다. 냉장고에서 콜라를 들고 와서 빨대로 콜라를 빨아먹고 있을 때, 남편은 이제 그녀의 품속에서 아기처럼 아주 편안하게 기다란 몸을 웅크린다. 그녀보다 두 뼘쯤 키가 더 큰 남편은 무릎까지 구부리며 그녀에게 안겨있다. 나는 그녀가 오늘 족두리에 연지 곤지를 찍고 왔더라면 더 어울리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남편이 엄지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있다면 어땠을까. 당장이라도 남편에게 달려가 더 어울릴만한 포즈를 잡아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샴페인에 젖어 마분지 같이 빳빳했던 그녀의 청바지에 스펀지처럼 물을 잔뜩 먹은 부드러운 얼룩이 져 있다. 낡은 티셔츠에는 작은 회색 점점 이들이 검은 바탕에 뿌려져 있다. 그래도 그녀의 차림새는 전혀 지저분해 보인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와 더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렇게 구제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있을까. 그녀는 결코 젊지 않은데. 불현듯 그녀에게 달려가 뺨이라도 한대 갈기고 싶은 충동에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면서 왼쪽 팔목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그녀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841번 버스를 떠올린다. 그녀는 그때도 구제 옷이 잘 어울렸다.


그 후, 내가 그녀와 두 번째로 마주친 곳은 교도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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