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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Sep 17. 2021

민지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 나는 이래봬도 꽤 재고 따지는 편이거든. 그 애를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들어왔던 건 ‘색’이었어. 파란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그 시절 대학생 남자애들은 대부분 무채색을 입었거든. 무채색 사이에서 쨍한 파랑이 눈에 확 띄는 거야. 당시에 ‘차도남’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이었는데, 파란색을 입은 남자가 어찌나 이지적으로 보이던지.


신입생 환영회 2차 가는 길에 여자애들을 잔뜩 모아놓고는 “나 쟤가 좋아졌어” 하고 선전포고를 했지 뭐야. 정말, 나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제일 목소리 큰 언니한테는 “언니, 나 저 애가 너무 좋아. 저 좀 밀어주세요” 부탁도 했다고. 


2차가서는 그 애 옆에 앉았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야구만 보고 앉아 있더라고. 보통 때면 “야, 뭐하냐.” 그러고 나무랐을 텐데, 내가 조용히 옆에서 땅콩을 까주고 있더라니까. 내가 까주는 땅콩을 그 애는 집어 먹고만 있고. 한 마디도 못 건네본 채로 그날 하루가 끝났어. 


첫 MT를 갔는데, 대성리 가는 무궁화호에서 내 자리 옆 팔걸이에 걔가 걸터앉더라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 ‘생각보다 까진 남자 앤가’ 싶기도 했는데, 앉아서는 도착할 때까지 암말도 않더라고. 일어서서 가려니 정말로 다리가 아팠던 거야, 진심으로. 

저녁 때는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하면서 술을 마시는데, 얘가 한 번도 게임에 지지를 않아. 게임이라면 두손두발 다 드는 나지만, 절대 취하지 않겠다 다짐했지. 시간은 5시반. ‘이젠 자러 들어가려나’ 싶었는데, 하나도 재미 없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 애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더니 뭘 하나 들고 나오더라? 보드카였어. 그때만 해도 소주랑 맥주, 막걸리 외에는 마셔본 적이 없었거든. 그 애랑 아침산책을 가겠단 일념으로 보드카도 조용히 말아먹었지. 다른 애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다같이 산책을 가게 됐지만. 


하루는 동아리에서 미술관을 갔는데, 미술관이 좀 어두웠거든. 혼자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내 위로 휴대폰 플래시 조명이 켜지는 거야. 위를 올려다봤더니 그 애가 있는 게 아니겠어? “이렇게 어두운데 뭐가 보여?” 그러고 웃더라고. 그때 짐작했지. 얘도 나한테 관심이 없진 않구나. 


만남이 거듭될수록 짐작은 확신이 되어가는데, 따로 연락하는 횟수도 늘어가는데, 사귀자는 말이 없는 거야. 심지어 연락하다 문자를 뚝 끊고는 꼭 일주일 만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연락이 다시 와. 몸이 뜨거워졌다 말라비틀어졌다를 반복했지. 

‘잠수연락’이 몇 번 반복되니까 진짜 사람 죽겠더라고. 대뜸 메신저로 화를 내버렸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사귀자는 거야 뭐야?” 말이 없던 그 애가 “사귀자는 거야…” 하더라고. 으름장을 놔서 사랑을 쟁취하다니.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우리는 동아리를 바로 탈퇴하고, 서로에게만 집중했지. 그즈음 3학년이 된 나는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학연수 얘기를 꺼내는 순간 집채만 한 남자애가 카페에서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울더라고. 그 길로 어학연수는 영영 포기했어. 

2학년이 되던 그 애는 군대를 가야 했는데, 나는 도저히 군대는 못 기다리겠더라고. “네가 제대했을 때, 옆에 있을 거란 확신을 줄 수 없다”고 말했더니,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대학원을 가겠다더라. 

세계를 유랑하는 히피를 꿈꾸던 나는 그 길로 발목잡혀 돈암동 백수가 되었고, 연봉 1억 회사원을 꿈꾸던 그 애도 그 길로 대학원을 마치고 기약없는 교수 임용을 기다리며 시간강사를 전전해야 했어. 두 사람 모두 이런 인생을 한 번도 기대해본 적 없는데 말이야.


만난 지 10년째 되던 해, 기다리던 결혼식 날짜는 세 번을 미뤄져 2021년이 되었고, 서로가 아니었다면 내 것이 되었을 수많은 선택을 후회하기도 해. 좀 더 여러 남자를 만났으면 좀 더 폭넓은 세계를 알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랑 코드가 잘 맞는 남자를 만났을지도 몰라. 실오라기만큼의 애정만 간신히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그 애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한 순간도 한결같지 않지만 우리는 왜 묵묵하게 서로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걸까. 


한 번, 헤어지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어. 인생이 너무 지루하더라고. 내일은, 모레는 어떨지 다 알겠더라고. 일부러 제주도까지 가서 헤어지자고 전화를 했어. 집 앞까지 찾아와 울고불고하던 그 애가 어느 날 걸음을 딱 끊더라. 그러고는 추석 때 전화가 오더라고. “영화 같이 볼 사람 없으면 전화해. 추석 잘 쇠고.” 마이너한 취향 탓에 자기가 아니면 영화 볼 사람이 없을 거란 허점을 파고 든 수작이었지. 일주일도 안 돼서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겨버렸고, 그 애 밖에는 같이 봐줄 사람이 없었고, 전화를 걸어 신촌 아트레온에서 만나서는 영화를 보고. 소주를 마시고. 우린 어쩔 수 없겠다, 그만 헤어지자고 합의하고. 지하철을 타고. 우리집 앞으로 와서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왜 그랬을까. 그 애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우리가 끝이라는 게 무서웠거든. 그 애 없이 혼자가 된다는 게. 

돈암동 백수와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강사로 어른이 된 우리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겠지? 법원에 갈 일만 없다면. 글쎄, 이것도 모르는 일이다만 법원에 가서도 아마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볼거야.

혼자가 될 서로를 걱정하면서. 


10년 넘게 한 사람하고만 만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절망이 고개를 들 때면 ‘마지막 숨’을 생각해.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분명 이 세상을 먼저 떠나게 될 텐데, 다른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쉬는 마지막 숨은 어떨까. 그때는 한 번의 숨이 너무나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잠든 그 애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두고, 들숨과 날숨을 느껴봐. 언젠가는 누군가 혼자가 될 날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면서. 


등장인물도 둘 뿐인데다 극적인 서사라곤 없는 언니랑 형부 얘기는 여기가 끝이야. 아마도 끝은 아닐 테지만, 아무도 더는 듣고 싶어 하지 않겠지.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 중 마음이 제일 넓은 너한테 들려주기로 했어.

서로의 발목을 잡고 기꺼이 발목 잡힌 시간 동안 그랬듯, 앞으로도 우린 많은 매력적인 선택지들 앞에서 ‘우리’라는 버튼을 누르겠지. 


그 버튼이 너한테도 언젠가 생기면 좋겠다. 재미없는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내 동생!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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