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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r 06. 2023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모처럼 화창한 날, 마당에 나왔어. 그런데 화단에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은 거야. ‘안 되겠다’ 싶어서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는데, 눈이 마주쳤어. 조그만 뱀 한 마리. 눈이 말똥말똥해서는 나를 쳐다보더니 점점 다가와. 도망치는 것도 잊고 가만히 서 있었어. ‘어쩌면 뱀이 저렇게 예쁠까’ 하고. 홀린 듯이 뱀이랑 눈을 맞추고 있는데, 내 곁으로 스윽 오더니 발을 꼭 물어버리는 거야. 어찌나 아픈지. 아무도 없는데 소리를 꽥 지르고는 뒷집으로 도망갔어. 우리 뒷집 아저씨는 나를 엄청 예뻐하거든. 


아저씨네 돼지우리에 갔더니, 아저씨가 돼지한테 먹이를 주고 있어. 막 울면서 뱀에 물렸다고 하니까 몸을 숙여서 내 발을 한참 봐. 그러더니 이러는 거야. 

“뱀에 물렸구나. 그런데 어쩌지? 한 번 더 물려야 돼.” 

'한 번 더 물려야 된다고? 이 아저씨가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리둥절해서 그대로 얼어 있는데, 아까 그 뱀이 언제 쫓아왔는지 내 옆에 바싹 붙어 있는 거야. 그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서는 나를 또 쳐다보더라.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발을 다시 꼭 물었어. 그런데 이런 마음 느껴봤어? 너무 아픈데 싫지는 않은 마음. 두 번이나 물려서 아파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그 아이가 예쁜 거야. 아, 참 예쁘다. 너무 예뻐서 눈을 뜨기 싫다. 꿈인 걸 알고서도 한참이나 눈을 감고 그 아이를 바라봤어. 어디서 그렇게 하나도  안 징그럽고 예쁘기만 한 뱀이 나왔을까? 하고. 


눈을 뜨니 겨울. 새해는 10일이 남았고, 내 나이는 육십다섯. 내가 좋아하는 화단이 있던 우리집은 사라졌고, 나를 예뻐하던 뒷집 아저씨도 소식을 몰라. 내 곁엔 영감이 되어가는 남편. 그리고 도시로 보낸 두 아이. 말수가 적어 평소에도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내 얘기는 사실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는 큰 아이와, 아직도 엄마만 보면 품으로 파고 드는 우리 막내. 


새해를 며칠 앞두고 아이들이랑 경주에 다녀왔어. 큼지막한 목욕탕에서 같이 목욕도 하고, 밤엔 불켜진 왕릉을 걸었지. 다음 날은 아이들을 태우고 바다에 다녀왔는데, 큰 아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어서는 내내 깨지를 않더라고. 바다에 도착해서도 도저히 잠이 안 깬다면서 도로 차에 들어갔어. ‘일하고 오느라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싶었지. 


시간이 흘러 계절은 여전히 겨울인 새해의 어느 날, 그 아이의 남편에게 들었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3킬로가 갓 넘었던 그 아이가 이제 막 생명을 품었다는 소식. 온통 검기만 한 초음파 영상 속에서 뽀얗게 반짝이는 심장을 봤을 때, 알아봤지. 아, 너구나! 내 꿈에 찾아와서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너였구나! 내가 낳은 아이가 낳을 아이, 네가 나한테 먼저 와서 인사하고 갔구나. 


그거 아니? 네 엄마도 나한테 오기 전에 지 할미한테 먼저 인사를 했대. 할미가 막 잠들려고 하는데, 뱀 한 마리가 창문으로 넘어와서는 한바탕 재주를 부렸단다. 막 태어난 네 엄마를 안았을 때, 그 아이 할미가 그러더라. “이 아이는 평생 지 재주로 밥 굶지 않고 살 거다.” 우리집이 엄청 어려울 때였는데, 평생 배 안 곯고 산다는 그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에이, 엄마. 솔직히 말해봐. 지어낸 거지?” 

네가 꿈에서 인사하러 온 이야기를 하자마자 네 엄마는 눈이 뾰족해서는 의심부터 하더라. 나도 덩달아 뾰족해져서는 “내가 꿈에서 봤는데, 이 아이는 너보다 훨씬 예쁘고 똘똘할 거다” 그랬지. 그랬더니 네 엄마가 좋다고 웃네. 어릴 적에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예쁘고 똘똘한 줄만 알더니. 네 엄마가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는 꿈에 본 네 눈을 또렷히 기억해. 믿기질 않아 같은 초음파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어떻게 네가 여기에 왔니’ 그런단다.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서 우리가 다시 만나도 나는 널 한 눈에 알아볼 거야. 그러니 아이야, 엄마 품 속에서 편안히 있다가 나오렴. 그때까지 하나만 부탁할게. 네 엄마 고생은 조금만 시켜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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