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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r 09. 2023

진지한 사람의 진심

사실은 웃긴 게 너무 좋아.

나는 매사에 진지하다. 내 머릿속에는 정사각형의 테이블이 있는데, 별 것 아닌 문제도 매일 심각한 사안처럼 스테이플러가 꽂힌 채 테이블 위에 오른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제 미처 끝맺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온갖 문제를 매의 눈으로 검토한다. 매일 이렇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야 되겠는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어서야 되겠는가, 도대체 운동은 언제쯤 시작할 것인가, 같은. 


테이블 구석에는 아주 오래된 서랍이 있어, 장기 보관해야 할 사안이 잔뜩 쌓여 있다. 앞으로 뭘해서 먹고 살 것인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결국 무엇이 되고 싶은가, 같은. 대학교 졸업 후 백수시절에 작성한 것부터 기억조차 까마득한 어린시절 어느 날부터 해결하지 못한 것까지 다양하다. 깊숙히 넣어두어도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긴급한 사안이 없을 때는 무조건 꺼낸다.  



“살다보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안 살아도 되더라.” 

사회생활에서 처음 만난 팀장님은 20대 끝무렵의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좀 진지한 편이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진지한 사람이 된 걸까? 

대학시절, 나는 심각한 자기과신에 빠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될 텐데, 내 인생 하나 맘대로 못 할까 싶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하면 생각한 대로 될 거였다. 


매번 생각은 결과와 조금씩 엇나갔고, 자그마한 내 인생을 바꾼 건 선배에게서 온 전화 한 통, 나가기 귀찮았던 어느 밤의 술자리, 점심 먹다 친구가 흘린 한마디 말, 갑자기 찾아 온 병까지.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것들이었다.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던 나는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먼지와도 같았다. 매번 어려웠던 결심은 가볍게 무너졌고, 우연이 주는 변화의 기울기는 넘어질 듯 가팔랐다. 


생각해봤자 쓸모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대로 되는 건 생각보다 너무 없다는 걸 충분히 깨달은 것 같은데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묵묵히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내고, 머리를 싸맨다. 시험이 끝난 후 오답이 가득한 시험지를 들고 “아, 이거 전에 봤던 건데” 하며 쓴웃음을 짓는 수험생처럼 말하고 싶은가 보다. “아, 이 상황. 예전에 언젠가 생각해봤던 거야” 하고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능숙한 척. 온갖 상황에 처한 나를 만든다. 어떤 불행도 나를 어쩌지 못하도록 앞서 준비한다. 


불행을 준비하면서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웃음을 맞닥뜨린다. 친구와의 카톡에서 터지는 실없는 농담, 물을 엎지른 고양이가 온몸을 흔들며 발을 터는 광경, 꿈에서 만난 낯선 이의 미소 같은 것. 그럴 때는 배에서부터 웃음을 끌어올려 웃게 된다.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내 인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별로 없구나.’ 웃는 동안은 머릿속 테이블도 깨끗이 잊는다. 출근길의 눈사람, 오래된 가족의 첫 휴가 같은 부드러운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진지해진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종이 위에 타이핑하는 무표정한 관공서 직원처럼 된다. 그러면서도 기다린다. 단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한 편지 같은 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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