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할 때 무통주사 맞는다고 고통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유난히 불편해하는 미소가 있다. 일부 개신교 신자가 지닌 특유의 미소다.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이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의 미소가 내게는 그런 미소다. 사람 좋게 웃고 있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왠지 그의 미소가 불편하다. 신기하게도 편하게 지내는 개신교 신자 중에 그런 미소를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런 미소가 불편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무리한 전도와 과도한 선민의식에 있다. 내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가끔 개신교 신자에게 교회에 다니라는 권유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람의 대부분은 그런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이△△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방송에서 어떤 선수가, “△△는 자꾸 전도하려 해서 말을 안 시켰다”라고 말하기도 한 것처럼, 다른 종교를 가진 동료들에게도 자신의 종교를 전도했다고 한다.
이△△ 개인이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여기저기에 말하면서 유명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발산하는 것이 문제다. 그와 아무 상관없고 그에게 관심 없는 나야 언뜻 듣게 된 그의 행동과 말에 피로를 느낄 뿐이지만,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구단으로 이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월드컵 때부터 기도 세리머니를 했던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그의 선택이 의외였다. 그래서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 구단으로의 이적을 포기한 것이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악의적인 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가 사우디 구단으로 이적할 때, 구단 최고 권위자와의 면담을 통해 계약조건을 걸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한국인 몇 명의 비자발급이었다. 그리고 해당 한국인은 목사와 선교사였다. 타 종교의 선교 행위가 금지되어 있는 나라에 타 종교인을 출입시키기 위해 그런 계약 조건을 내건 그. 게다가 한 개신교 방송에서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그. 너무나 비상식적임에도 당당한 그의 행동이 불편하고, 한때 초롱초롱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빛이 무서워 보이기 시작했다.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무통주사에 대한 그의 발언을 기사로 접하고, 그에 대해 쓰려다 보니, 기본적인 그의 신념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임신과 출산을 겪은 당사자로서, 알량한 모성애로 포장해서 엄마의 선택을 신성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통주사 없이 자연분만을 해야(모성애 부담① 자연분만vs제왕절개), 모유수유를 해야(모성애 부담② 모유수유vs분유수유). 하던 일을 그만두고라도 3년은 직접 아이를 돌봐야(모성애 부담③ 워킹맘vs전업맘, 어린이집) 진정한 엄마라는 식의 시선이 너무 불편하다. 그들이 신성시하는 선택을 하지 않은 엄마는 뭔가 부족한 엄마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무엇보다 엄마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출산은 고통이 수반된다. 고통없는 출산은 없다. 모성애, 축복, 사랑, 기쁨 등의 단어로 포장해도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통주사를 맞더라도 일시적인 것이지, 고통이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출산의 고통은 잊혀지지 않는다. 오해를 일으키는 무통주사의 명칭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처음에 무통주사와 관련된 그의 기사를 봤을 때, 참 씁쓸했다. 출산의 주체가 아닌 남자가 그런 의견을 낸다는 것 자체부터 별로였다. 물론, 부부 모두 독실한 개신교 신자고 서로 의논하는 와중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가 혼인 서약할 때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인 “남편에게 순종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의 해산 고통은 신께서 주신 것이니 피하지 말자고 아내를 설득했고, 예전 출산 경험으로 그 고통을 알고 있는 아내가 고민 끝에 의견을 따랐다고 하니 말이다.
어떻게 출산하든지,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타인에게 보란 듯이 조언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의 부인도 많은 생각을 한 후에 결정했겠지만, 부인이 따랐다고 해서 이△△ 발언의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인의 선택과 별개로,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그의 발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들었던 유머(?)가 생각난다. 어느 독실한 목사가 수해 피해자가 되었는데, 구조대의 도움을 거절한 채, 신이 구해줄 것이라며 기도만 했다고 한다. 결국 하늘나라에 간 그가 신을 만나서, 왜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신이 그에게 한 말.
다르게 생각하면, 무통주사는 출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줄어드는 것도 아니지만) 신이 개발하도록 도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 도움을 왜 마다하는가. 고통은 안 받을수록 좋은 것인데, 왜 그 고통을 감내하라 조언하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왜 자신의 선택을 과시하는가.
아파야 출산이라는 거야, 뭐야.
임신부터 출산을 거쳐 육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관련된 모든 것을 오롯이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주변인 모두 내 선택을 존중해줬고, 내가 겪을 고통과 아픔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선 넘는 발언이 있긴 했지만, 넘길만한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오지라퍼의 섣부른 조언은 불필요하다.
아무튼, 그의 해명글을 보면서, 이 사람은 역시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 댓글을 비꼬면서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의 아내를 치켜세우는 그 글은, 그의 미소가 연상되는 글이었다. 내 글 역시 그에게는 ‘분노의 찌꺼기’에 불과하겠지, 뭐. 나는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작은 마음의 공간조차 없는' 속 좁은 사람일 뿐이니까.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단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이 짧은 시간들..
매일같이 수백 개씩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 마다 여지없이 묻어져 있는 분노의 찌꺼기들을 보며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짧습니다.
혹 누가 설령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작은 마음의 공간이 없는 걸까요..?
- 이△△ 페이스북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