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방울토마토와 오이를 씻었습니다.
방울토마토는 반 토막으로 자르고, 오이는 껍질을 벗겨 동그랗게 썰었습니다. 그 위에 레몬즙과 매실액을 한 스푼 올리고, 올리브 오일, 소금과 후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린 뒤 샐러드를 만들었습니다. 토마토의 단맛과 아삭한 오이의 식감, 상큼한 레몬 향으로 인해 행복해졌습니다.
아침을 먹고는 현재 기획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노트북만 키고 앉아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까닭은 뚜렷한 목표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것 같은데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졸업영화가 복을 많이 받아 2년째 여기저기 상영되고 있지만, 차기작은 언제가 될지, 가능은 할 지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작가도, 감독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그런 소리를 이따금씩 들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내게 그렇게 불러주질 않습니다. 나의 현재 꿈이 무엇인 지도 잃어버렸습니다. 확고하다고 믿었던 꿈들이 서른이 되니, 먼지처럼 공중에 떠돌기만 합니다. 떠돌아다니는 꿈의 먼지들을 잡을 의지도, 하나로 모을 열정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취를 한 뒤에는 고정수입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나는, 소속감은 있을지 몰라도 내 쓰임새가 정확한 곳에 쓰이고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언젠가, 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끄적끄적 매일 무언가를 적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고충을 너무 자주 말하고 있는 나 자신도 우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토마토와 오이가 있었으니 행복했습니다.
점심으로는 감자를 썰었습니다.
감자를 채 썰어 물에 담근 뒤, 소금 간을 해서 살짝 데쳤습니다. 파 기름을 내서 간 마늘과 볶고, 데친 감자와 양파를 섞어 살짝 볶았습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통깨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감자볶음과 뜨끈한 잡곡밥, 검은콩을 함께 먹었습니다. 감자가 잘 익었는지 찐득한 단맛이 풍겼습니다. 밥을 다 먹었는데도 반찬이 많이 남았지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감자로 인해 행복해졌습니다.
오후에는 책을 보러 동네 서점에 갔습니다. 이사를 오고 집 정리를 하느라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한 달 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은 처음이었고, 책을 읽지 않으니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 같았습니다. 쌀알같이 좁아져가는 마음을 넓게 피고 싶어서 서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책을 한참 고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캐논 변주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책을 고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들으니 행복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새우를 해동시켰습니다.
녹은 새우를 손질하고, 양파와 애호박을 잘게 썰었습니다. 파 기름을 내고 야채를 볶아 노릇해지면 새우를 넣고 익혔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넣어 한참을 볶았습니다. 한쪽에는 계란을 풀었고, 계란이 익었을 때 즈음 야채와 함께 버무렸습니다. 간장과 후추로 마무리했습니다. 깻잎을 반찬삼아 먹었고, 아침에 먹은 샐러드에 옥수수콘과 양파를 추가했습니다. 레몬 향을 더 맛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한 스푼 더 넣었더니 맛이 훨씬 풍부해졌습니다. 애호박에서는 녹차의 맛이 났고, 양파의 단맛과 통통한 새우살이 맛이 좋았습니다. 양파를 추가한 샐러드는 훨씬 아삭하고 상큼했으며 옥수수콘으로 인해 달고 고소한 맛이 났습니다. 나름 환상의 조합이었던 것 같아서 행복했습니다.
저번 주말에는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는데, 오늘은 삼시 세 끼를 다 차려 먹었습니다. 큰 움직임 없이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 재료들로도 나는 충분히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감자는 감자 맛이 났고, 토마토는 토마토의 맛이 났을 뿐인데, 이것은 잘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무엇 하나 싱싱하지 않았더라면, 그 맛이 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내 손맛이 더해져서 뜻깊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좋은 재료들로 하루를 보낸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불평과 불만으로 보낸 나는, 음식도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재료의 본연의 맛을 가리는 소스의 맛에 취해 있었고, 그런 것들에 중독되다 보니 점점 몸도 마음도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살리듯이, 재료 자체에서의 맛도 소중한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달콤함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글 여미
사진 여미
여미의 인스타그램 @yeomi_writer
yeoulhan@nate.com
오늘, 방울토마토 하나 씻어서 먹어보는 거 어때요?
달아요. 그 어떤 것 보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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