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분 소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스물아홉, 유난히도 추웠던 작년 겨울에 한 살 동생인 경선이와 해돋이를 보러 갔었다.
처음으로 연봉이 높은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해달라는 말이나 로또에 당첨되게 해 달라는, 이제 그런 소원 따위는 빌지 않았다. 이제 서른을 앞둔 만큼, 내년에 연애를 하게 되면 꼭 크리스마스를 넘겨달라고, 20대 내내 당했으면 이젠 좀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눈을 감고 여러 번 소원을 빌었다.
야, 선아, 나 또 차였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믿었다. 우리의 첫 만남이 꽤 특별했고, 내가 좋아하는 체크무늬 셔츠를 자주 입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그의 리듬이 나와 잘 맞았다고 믿었다.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를 꼭 넘기리라, 괜한 싸움을 만들지 않으려고 올 겨울부터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내 아이폰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도, 약속 시간을 잊어버려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게 했던 것도, 택시만 타면 내가 선물해준 물건을 두고 내리는 이상한 습관을 가졌을 때도, 나는 화 한번 내지 않았다. 이건 모두 크리스마스를 위한 나만의 비밀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는 크리스마스를 넘기지 못했다.
만난 지는 약 11개월 하고도 25일,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부터 그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언니, 나와. 해 보러 가야지
스무 살 때부터 내 연애는 이상하게 크리스마스만 되면 무너지곤 했다. 무슨 기간제 연애도 아니고. 회사로 치면 퇴직금도 받지 못하는 수준의 이별 기간이다. 이런 징크스는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사실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매년 일어나고 있다. 일단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면 무조건 나는 이별을 경험한다. 그것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통보로 말이다. 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산타였나 보다. 썰매 끌다가 운전을 잘못했다던가 루돌프에게 밥을 안 줬던가 해서 크리스마스 전날에 잘렸던 거다. 분명히. 그렇지 않고서는 나에게 이런 벌이 내려질 수는 없다. 작년에는 경선이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아르바이트까지 빼서 바다를 보러 가줬는데, 누가 복사 붙여 넣기를 한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이번에는 헤어졌다는 말을 경선이한테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특별하다고, 느낌이 온다면서 여기저기 입을 놀렸던 내 주둥이를 격하게 때리고 싶어 졌다. 그래,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조용히 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SNS에 아무것도 올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있는 거야.
3%
이 세상에 모든 캐롤이 슬프게 들렸다. 차라리 출근을 하고 싶어 질 정도로,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다. 막상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자, 자연스럽게 캐롤을 틀고 샤워를 했다. 오늘은 아무 계획 없이, 맛있는 초코 케이크과 와인을 마시면서, 분위기 있는 로맨스 영화를 하루 종일 봐야지.
이상하게 이번 주 내내 핸드폰도 충전하기 싫었다. 충전기가 없으면 바로 배터리가 바닥을 치지만, 어차피 충전해봤자 연락 올 곳도 없고 특별히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싶지도 않아졌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바꿀까 하다가, 뭐, 아직까지는 크게 불편함은 없기에 옆에 두고 있다. 이제는 전 남자 친구가 되어버린, 그가 망가뜨린 아이폰은 상태가 메롱이 된 채로 꽤나 꿋꿋이 버텨주고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
빵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만큼은 크리스마스니까 반드시 케이크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도 초콜릿 케이크로. 혼자 살기에 조각 케이크로 간단히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혼자 보낼 거 근사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축하해줄 사람도, 축하받을 일도 없지만, 나 스스로에게 멋진 일상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오후쯤 케이크를 사러 가려고 했지만, 뜨끈한 이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저녁 8시가 돼서야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켜니 배터리가 3%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필요도 없는 거, 그냥 집에 두고 올까, 하다가 어젯밤 통신사에서 보내준 케이크 할인 쿠폰 문자가 생각났다. 계산할 때 잠깐 켜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3%면, 충분하다. 솔직히 1%여도 쿠폰 열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방전이 안된 것이 나름 괜찮은 행운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신기하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매년 겨울이 되면 볼 수 있는 흰 눈인데도, 볼 때마다 신기하고 묘하다. 모자가 달린 잠바를 입고 올걸 그랬나, 라며 구겨진 후드의 자크를 올렸다. "크리스마스에 차인 마당에, 눈 좀 맞으면 뭐 어때" 누가 내 귓가에 속삭인 것 같아 고개를 돌렸으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빵 집에 점점 가까워졌을 때, 좀처럼 울리지 않았던 전화벨이 모처럼 울렸다. "크리스마스에 누구지?"
액정 화면에는 이름이 뜨지 않았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눈은 짧은 시간 안에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슬리퍼만 신은 탓에 발가락은 빨갛게 달아오른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고민할 틈도 없이 이미 내 손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나야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멎었다.
내 귀가, 머리가, 가슴이,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지만 더욱이 놀랐던 것은, 그가 어떤 용건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와의 통화가 간절해졌다는 사실이다.
3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전 남자 친구로부터 크리스마스에 이별통보를 당하고 혼자 DVD방에 간 적이 있었다. 새벽에 간 탓에 손님은 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와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을 얘기하다가 카운터에서 밤을 꼴딱 새운 적이 있었다. 이과 대학생이지만, 교내 영화 동아리에 가입할 만큼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만난 지 24시간도 안돼서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잘 지내?"
"뭐, 그렇지... 오랜만이네 엄청."
"그러게, 번호 안 바뀌었네. 사실 전화받을 줄은 몰랐는데."
왜 지가 전화를 걸어놓고 받을 줄은 몰랐다고 하는 거야? 순간 자존심이 상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생각보다 내가 너무 빨리 응답을 한 것 같아 조금 후회를 했다. 전화벨을 더 기다려보고 받아야 했었나, 어째야 했었나,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오잖아. 배터리는 닳아있었고, 어쩔 수 없이 받아(버렸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설명이 구구절절한 것 같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몰랐어, 번호 없어서 이름도 안 떴고.."
"역시 지웠구나, 내 번호"
"뭐,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렇지, 3년 전인가 우리."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스치듯 핸드폰 배터리가 생각이 났다. 부리나케 액정 화면을 열어보았다. 배터리는 금세 1%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에게 이 상황을 말하고 조금 뒤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해야 하나, 지금 집으로 뛰어가야 하나, 그러면 초콜릿 케이크는? 할인 쿠폰은?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 때, 그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나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채로 바닥을 보았다. 5분 정도 서있었던 것 같은데 내 발 위로 금세 흰 눈이 이불처럼 쌓였다. 분명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을 발이, 가슴이 뜨겁게 요동치느라 다른 감각들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빵집 내부에는 잔잔한 캐롤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도"
힘겹게 말을 꺼냈을 때, 액정 화면이 차가운 돌덩이처럼 변질되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배터리는 어느새 나가 있었고, 나의 마지막 말이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채 꺼져버렸다. 그와 연결이 끊어지자 몸의 감각이 빠르게 되살아나면서 발바닥을 털었다. 온몸이 너무 차가워서 어디든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빵집으로 달려갔다.
18,000원
핸드폰이 방전되어 쿠폰은 사용하지 못했다. 뭐, 별로 차이는 안 나니까, 하며 정가에 케이크를 샀지만 어쩐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충전 잘해놨을 때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니만, 왜 하필 이럴 때 나가버리는 거야.
케이크를 한 상자 들고 집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침대에 앉았다.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3년 전, 나를 크리스마스 당일에 차 버리고 사라져 버린 나준섭한테 전화가 왔었고,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아버렸고, 그러다가.....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며 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을 때 핸드폰이 켜졌다. 그에게 부재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는 문자가 왔다. 순간, 바로 그에게 통화를 하려다가 내 마음 한 구석의 누군가가 재빨리 낚아챈 듯 종료를 누르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많이 좋아했었고, 언제든 그의 연락을 기다리곤 했었다. 크리스마스에 차였다는 것 말고는 그에게 원망도, 미움도 없었다. 그와 있으면 하루 종일 영화 이야기로 밤새 떠들 수 있었고, 좋아하는 배우와 감독 이야기들로도 우리는 코드가 잘 맞는 커플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런 것들은 원 없이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로부터 나를 막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였다. 힘 없이, 꺼져가는 불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고, 방금 사온 초콜릿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초를 불까 하다가, 배가 고파 일단 케이크를 한 조각 먹기로 했다. TV를 틀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까 내가 그의 전화에 내심 반가웠던 이유는 눈이 내려서였고, 캐롤이 흘러나와서였고, 케이크를 사러 간다는 생각에 조금 들떴을 뿐이라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른다.
그저, 적당한 타이밍에 핸드폰이 방전되어 주었다는 것이 나름 잘된 일이라는 생각 밖에는.
내가 생각한 것 만큼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그렇게 말끔히 지워지지는 않았나 보다.
서른이 되니 이젠,
모든 과해지는 것은 싫다.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나를 위해 쓰기로 한 날이니까,
혼자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날이니까.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역시나, 맛있다.
물론, 3%만 먹으니까 말이다.
크리스마스 기념 단편소설 입니다. :)
어떠셨나요 헤헤
코로나라 힘든 시기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여러분(하트)
글/그림 여미
하루 5분 소설
yeoulha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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