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개론. 3화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진화론적 사고방식이 잘못된 또 다른 이유는 사랑은 우리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 사회적 분위기상 '현실에서 동 떨어진 낭만적인 생각하고 앉아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들이 사랑을 '설레임과 같은 감정적인 상태'나 '성적 욕구나 욕정'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랑은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지독하게 이기적인 만큼 지독하게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순간을 이기적으로, 자신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럴 수는 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어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어 한다. 사람을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람들도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남길 원한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그건 인간이 타고나기를 사랑받길 갈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타고나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김 받는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 외에는 그런 특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줘야 한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쌍방향적인 사랑의 감정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일어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한쪽이 상대를 먼저 통상적인 사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챙겨주면서 생겨난다. 이 시리즈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사실 우리가 많은 경우 사랑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호르몬 작용과 감정은 사실 이걸 가능하기 위한 도구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작은 정성들로 시작되겠지만 그 관계가 깊어지고,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그 사이에는 '현실적인' 필요들이 생기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필요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노력이 쌍방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그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대하는 것'이라면 쌍방향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대해야만 하고,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하며 맞춰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에게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00은 안 해줘?' 라거나 '사랑한다면 00은 해주거나 사줘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하기 전에 '나는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해줬나?'와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고 내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에는 어떤 노력이 들어가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니, 상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욕망, 욕정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경험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리고 사랑받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어도 상대에게 받는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도 탄력을 받게 된다. 전쟁터 같은 사회에서 경쟁하며 입은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사랑 밖에 없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했어도 그런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두 사람 중 최소한 한 명은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한 명이 상대를 오롯이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는 사람은 사랑이 필요한 존재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느낌과 경험이 축적되면 그 사람도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연인과 부부는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건 사랑보다 다른 것을 인생에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돈을 많이 버는 것과 커리어를 쌓는 것을, 그리고 내 취미생활과 일정 수준 이상의 소비를 하는 것이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상대에게 소중하게 여김 받는 것보다 중요시하면서 상대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 우선순위에서 상대가 계속 내려가게 되다 보니 상대 대신이 자신이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될까? 그렇게 되는 건 꽤나 많은 경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물질적인 가치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패자가 된다고 겁을 주다 보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수록 다른 가치들을 더 중요시하게 되곤 한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돈과 물질을 추구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가치들이 우선순위에서 더 높은 곳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긴장감을 늦추면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된다. 그리고 사실은 돈이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면서도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현실에서 한 걸음 멈춰서 생각해보자. 당신이 일하고 돈을 벌면서 성공하거나 명예를 갖기 위해 시간을 쓸 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당신과 그들은 서로를 모르게 되는데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사랑이 아닌 다른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쓰면서 어떻게 상대가 당신을 이해해 주길 바랄 수가 있을까?
사랑이 인생의 목적이야 하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당장 물질이나 사회적 성공, 명예를 추구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과정과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을 목적으로 현재를 충실히 살면서 물질과 사회적 성공, 명예는 우선순위에서 한 단계씩 낮춰놓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쉼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만 물질과 사회적 성공, 명예를 우선순위에서 높은 곳에 놓고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날카롭고, 예민하면서 항상 경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는 물질과 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상대를 짓밟아야 하며, 내가 언제든지 짓밟히거나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고받으며 산 사람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짓밟고 짓밟히며 산 사람의 경험이 축적된 삶은 그 말로가 꽤나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물질과 사회적 성공, 명예를 쟁취한 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보장한다면 그것을 1순위로 놓고 사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목표로 삼고 쟁취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요소들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과 행복은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이루고 나서 느낀 허무함을 고백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한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에 우울증을 경험하거나 마약, 술, 섹스처럼 자극적인 것에 중독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은 물질과 사회적 성공, 명예가 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지속 가능하지 않단 것을 보여준다.
오해하지 말자. 물질과 사회적 성공, 명예가 나쁜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더 여유 있게 보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거나 명예를 얻게 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서는 그것들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그것을 추구하는 지를 알면서 추구해야 한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죽고 싶었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던 순간에 사랑이 인생의 수단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는 30대 초반까지는 사랑과 결혼을 나의 사회적 성공의 수단으로 삼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내가 갈 기회가 있었으나 가지 못한 길을 가는 지인들을 보며 '내가 저 길을 갔다고 해서 더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들이 모두 불행하단 말이 아니다. 계속 실패하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죽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삶이란 생각이 들더라.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성공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지만 그게 지속 가능하진 않을 뿐 아니라 그걸 성취해 내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럴 바에야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살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통 속에 살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때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묵상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며 살지만 죽음은 필연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무엇인가는 우리 죽음 후에 무엇을 남기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하기도 하는데,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 한들 그게 얼마나 오래 남으며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정도는 되어야 역사에 계속 남을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과 고 정주영 회장도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그들은 큰 의미도 없고, 엄청난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아니, 큰 의미가 있다고 치자. 그게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우리가 죽어서 이름을 남긴 다한들 그게 우리에게 어떻게 득이 되는가?
이 땅에서 이루는 것들은 모두 그런 한계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 끝에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지보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누리고 얼마나 지속 가능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과정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존재다. 사랑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