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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ul 14. 2018

연애와 스킨십

그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남자들 사이에서 '혼전순결' 얘기를 하는 순간 나는 항상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는 했다. 혹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며, 성적 취향이 다른 게 아니냐며. 아니었다. 다만 난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다른 남자들보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순수 혹은 순진하게 살았고, 겁이 많아서 남들이 알게 되면 부끄러울 일을 하는데 두려움이 있었고, 숙박업소에 대실을 하러 들어가는 게 싫었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의 욕구, 욕망과 감정이 있었지만 특정 선을 그렇게 쉽게 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했던, 교회 안에서 누구도 왜 소위 말하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지에 대한 분노와 혼란은 연애를 하면서 그에 대한 대화를 하고, 주위에 여사친이 많았던 특성상 그녀들에게 들은 얘기들을 통해서 정리되어 나갔다. 그 이후에는 '왜?'는 설명하지 않으면서 율법적으로 특정한 기준을 강제하는 문화가 어쩌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문화보다도 폭력적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아마 작년 이맘때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스킨십에 대한 글을 몇 개 연달아 쓴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꼭 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고, 개방적인 것을 넘어서 문란하기까지 한 듯한 문화에, 마치 [스킨십=사랑]인 것처럼 이뤄지는 논의에 분노한 마음에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공간에서 연애, 결혼, 사랑에 대한 글을 1년 넘게 쓰면서 사실 내 안에도 많은 것이 새롭게 정리되었고, 내 안에도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그런 문화와 흐름에 대한 분노는 조금 잦아들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문화가 맞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분노했던 내 모습 또한 가장 이상적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로 자기만족, 두 번째로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동조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모습으로 특정 주제에 다가가는 것이 그 반대 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


사실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안에 쌓여 있던 생각과 소재를 작년 4분기 정도까지 탕진하고 나서 그 생각들을 다시 돌아볼수록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연애, 결혼도 '케바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듯하다. 사람은 다 다르지 않나?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모습이 나오지 않나? 그렇다면 누가 감히 누구의 연애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런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스킨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선을 그을 수 있겠나?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어디에 있겠나? 다만 분명한 것은 스킨십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가장 큰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분명하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본인의 주관이 옳다고 강요하면서 그 신체를 자의에 반하는 방식으로 다룬다면 그게 폭력이고 폭행이지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나?


사랑은, 연애는, 부부생활은 평등한 지위에서 상호 간에 존중을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여야 한다. 모든 면에서 말이다. 거기에서 스킨십은 더 신중하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거나 의사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스킨십이 이뤄지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상대방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을 쇠고랑에 묶고 당신이 싫어하는 행위를 당신의 신체에 가한다고 상상해 보면, 아마 연인이라는, 사랑이라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강제되는 '너도 좋잖아'라는 일방적인 해석을 기초로 이뤄지는 스킨십의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몸이 열려야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마음이 열려야 몸이 열리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둘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후자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그래 왔다. 전자와 같이 형성된 관계의 경우 사실 스킨십의 영향이 너무 커서, 지금 돌아보면 과연 내 마음이 열렸던 것인지에 대해서 물음표가 드는데 그건 그 관계에서 깊은 대화의 시간보다 스킨십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더 나누고,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갔던 것은 분명 후자의 방식으로 형성된 관계였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어서 주위에서 좋게 말하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하면 문란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수록 그 생각이 더 확고해지고, 역설적으로 스킨십을 더 오랫동안 잘 하면서 그 안에서 느껴지는 사랑을 오랫동안 누리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조금은 천천히,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20대 초반부터 자유분방하게 살아면서 나를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이 대부분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되어서 이제는 스킨십에 대해 흥미 자체를 잃었고 신체적인 반응도 오지 않는다는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킨십을 많이 해야 '잘' 할 줄 안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한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서 그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이제는 주위에서 꽤나 자주 보인다.  


이런 생각들의 끝에 내가 내리게 되는 결론은 스킨십에 있어서 특정한 행위나 시기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스킨십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것일 수 있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마음이지 특정한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만약 연인 간에 서로를 그렇게 존중하고 자신의 마음에 따라 소신 있게 결정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는다면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혼전순결' 혹은 '혼후관계'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지켜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에 대한 내 생각들은 작년 초에 내가 썼던 소위 말하는 첫 경험에 대한 글(링크) , 스킨십과 마음에 대한 글(링크), 그리고 혼전순결에 대한 글(링크)로 대신하려 한다.


최소한 '사랑한다면...' '연인이라면...' '좋아한다면...' '만난지 얼마 됐다면...' '부부라면...'이라는 말로 무엇인가를 강제하거나 구걸하지는 않는게 맞다. 그 표현들은 그 강제 혹은 구걸되는 것을 방어하는데도 그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과 의사가 우선이고 당신의 연인은, 배우자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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