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되, 의사처럼 생활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 우리 병원 소화기내과 과장님께서 심혈관 조영술을 받으셨다. 원래 심근경색으로 스텐트를 삽입하신 상태셨는데 최근 들어 가슴이 많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으신다고 하였다. 담당 심장내과 교수님은 별 이상 없을 거라고 하셨지만, 본인은 많이 걱정하셨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 수도 더 없으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멍하게 지내시는 시간이 많았다.
대학병원의 소화기 내과 과장은 항상 차기 병원장 혹은 부원장으로 거론되는 중요한 직책 중 하나이다. 병원 매출에 매우 큰 포션을 차지하는 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장님께서는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고 이제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조용히 은퇴하고 싶다고 하시지만, 아직도 중요한 병원의 사안에서는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하시고 발언하시곤 한다.
원래 과장님은 매우 성격이 급하고 목표지향적이신 분이었다고 한다. 내시경실의 정규 시술은 5~6시 정도에 모두 끝났는데, 9시까지 남아 시술하실 때도 비일비재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실 때도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모두 병원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 과장님이 심근경색을 앓으시고 성격이 정반대가 되셨다. 회식 날이면 센티해지실 때도 많았다.
과장님은 많이 지쳐 보이셨다.
스텐트를 삽입하면 매일매일 빠짐없이 아스피린과 클로피도그렐 같은 항혈소판제를 복용해야 한다. 항혈소판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스텐트가 막힐 위험이 있고, 그렇게 되면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혈소판제를 먹게 되면 멍도 잘 들고, 운동할 때도 무언가 소심해지고, 자신이 이제 일반인이 아니라 환자라는 사실을 매일 자각하게 된다고 한다.
“의사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되, 의사처럼 생활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중년의 의사들 중에서는 아프신 분들이 동일한 연령대의 직군보다 많은 거 같다. 오십견, 손목터널 증후군 같은 직업병부터, 심근경색 및 각종 암까지. 아마도 많은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노출되어야 하고 자신의 건강관리는 뒷전인체 남의 건강만 챙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겠다.
아무튼 심혈관조영술 결과, 과장님의 심혈관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대퇴동맥이라는 다리의 큰 혈관에 굵은 와이어를 집어넣어야 하는 시술이라, 병실에 하루 종일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많은 화환 옆에 가만히 누워계시는 과장님을 뵈었다. 가운을 벗고 보니 영락없는 동네 어르신이었다.
“너희들은 젊었을 때부터 건강관리 잘해라. 담배 피우지 말고, 운동도 꼬박꼬박 하고. 젊었을 때 좋은데도 많이 다녀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보고 그렇게 살아”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를 침상에서 하시니, 왠지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인 앞으로 입원한 환자 걱정. 환자복을 입고도 다른 환자 걱정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잘못하면 웃음이 나올뻔했다.
며칠 전 퇴원하신 과장님은 필라테스 학원에 열심히 다니신다고 한다. 어려운 자세를 하고 계시는 모습을 자신의 카톡 프사로 올려놓으셨다. 자신은 뭔가 자랑스럽다고 올려놓은 사진이 젊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최근에는 스마트 워치에 빠지셔서 지나가는 펠로우들 붙잡고 이거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자꾸 물어보신다. 스마트 워치를 차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부러워 보인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과장님은 은인 중에 한 분이시다. 원래 펠로우 지원은 한 해전 9월 10월 중에 모두 끝이 난다. 예를 들어 2020년 4월부터 근무 예정이라고 하면 2019년 9,10월에 지원을 해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2019년 이맘때쯤 1년 쉬면서 여행을 다닐 계획이어서 어떤 병원도 지원을 안 하고 있다가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병원 소화기 내과 전임의로 지원한 게 2020년 4월,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안 받아 준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 과장님을 뵈었을 때, 자신이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이렇게 늦게 지원하는 펠로우가 어디 있냐며 역정 아닌 역정을 내시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렇게 화를 내신 뒤, 나를 소화기 내과 전임의로 일하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무나 감사하다. 오늘 스마트 워치를 어떻게 페어링 하는지, 설정을 어떻게 하는지 이것저것 알려드렸다. 놀라워하시는 모습이 뭔가 할배스러워 친근하기도 했다가 짠하기도 하고 그랬다.
어느덧 나의 전임의 생활이 끝이 나간다.
과장님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좋은 분이었고, 좋은 의사이자 스승님이었다고 기억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