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2주간의 휴가
임상 강사가 끝나고 와이프와 함께 에어비앤비로 2주간 제주도의 집을 구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임상강사까지 끝냈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였기에 스스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언젠가 아내와 제주도 여행을 중에 장난 삼아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 앞에 예쁜 바다가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조금 우습지만 그게 항상 궁금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의 바다를 보기 위해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갔던 날이 기억난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심한 멀미에 시달렸던 기억... 참고 견디던 그 끝에 펼쳐졌던 짙고 푸른 무심한 바다. 그런 무심한 바다 앞에서 느껴지는 어떤 무상함과 허무함. 고요 같은 것.
집 앞에 저런 바다가 있다면 분명 하루 종일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다행히 새로운 직장 출근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약간 충동적으로 우린 제주도 숙소를 예약하고 실행에 옮겼다.
제주도 숙소는 기대 이상이었다.
스마트폰으로 흐릿하게 보이던 창문 너머 바다는 실제로 햇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늦잠을 자고 부스스한 머리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한 커피를 들이켜며 창문 너머를 바라볼 때는 마치 내가 재벌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바다를 보면서 스스로 몇 가지 결심을 하였다.
평소 하와이에 사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동경했던 나였기에, 그를 조금 따라 해 볼 생각이었다.
1. 매일 일찍 일어나서 조깅하기
2. 하루 한 편 글쓰기
3. 매일 장을 봐서 밥을 해 먹기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제주도 생활에 대한 나의 환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보기엔 예뻐 보이던 제주 바다는 실제로 매서운 바람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당시 겨울이었다.) 집 앞의 바다를 보며 조깅하는 것은 바람 때문에 삼일 만에 그만두었다.
산책하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닷가의 올레길은 심한 바람과 비로 집 안에서 구경할 때가 더 많았고, 바다를 크게 볼 수 있어 좋았던 커다란 창문은 혹시라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까 봐 커튼을 쳐놓았다. 그리고 놀라웠던 집 앞의 바다는 어느새 당연한 게 되어 있었다.
제주도까지 왔으니 왠지 유기농 채소와 제주산 흑돼지로 손수 요리를 해 먹어야 할거 같던 강박에 시달리던 나는 매일매일 요리를 하다가 엄청난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로, 손쉽게 한 끼 때울 수 있었던 '배달의 민족'이 이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가운만 벗어놓는다고 쉬는 것일까?
제주도에서 나와 와이프는 앞으로의 직장 문제, 나이 들어감의 불안감 같은 것들로 빼곡히 저녁을 채웠다.
"2주간 너무너무 좋았어. 하지만, 2주보다 더는 못 있겠어.."
결국 우리가 생각한 결론이었다.
제주도의 풍경은 일에 치이면 살아온 우리에게 너무나 과분할 정도의 선물이었지만, 편리했던 도시의 생활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우리 부부(정확히는 나)는 생각보다 훨~씬 게으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은 이런 건지도 모른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금과 다른 일을 하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어쩌면 스위스의 지금 상황은... 그저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 쉽게 해주는 것이라서 '행복해지기'도 더 쉬운 것 같다
-행복의 지도, 에릭 와이너
이제는 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부산에 살 때는 서울 생활이 그립고, 서울에 오니 제주도가 그립고, 제주도에서는 다시 부산이 그립고...
의사가 되니 다른 직업이 좋아 보인다.
제주도에서 유기농 채소에 밥을 지어먹는다고 내가 <효리네 민박>에 나오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여유로운 바다가 보인다고 해서 내 마음의 불안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어떤 삶의 짧은 코스프레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2주간의 제주도가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반대다.
다른 어떤 삶을 흉내 내 봤기에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비행기 창밖에서 저 멀리 예쁜 제주도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게 몰려왔다.
제주도에서 나는 아주 자유로웠고,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도 없었으며, 하루 종일 잠만 자도 됐었지만... 때론 무한한 '자유'가 좋은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제주도가 '자유'라면 나는 그 자유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이제 나의 자리로 돌아감으로써.
과거는 언제나 그립고
현재는 지질하며
미래는 언제나 불안하다.
또 한 번 더 다짐해본다. 현재를 살자고. 지금이 미래의 내가 가장 그리워할 어떤 순간이 될 거라고.
1년 후의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