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살이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에 갔던 기억이 있다. 이 이야기를 서울 친구들에게 하면, 그렇게까지 롯데월드에 가고 싶었냐고 놀려댔다. 이렇듯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곳에는 롯데월드뿐만 아니라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63 빌딩도 있었고, 무엇보다 도시 곳곳을 연결해주는 지하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면접을 보기 위해 상경해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보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조금 오래 머물 기회가 있었을 때 티머니를 구입하면서 왠지 모르게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까지는 일회 승차권을 끊어서 탔었는데, 티머니를 구입한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서울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어느덧,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서울은 지하철 노선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많이 변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서울은 여전히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서울에서 직장을 구한 지 두어 달이 되어 간다.
과거에는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갔던 여행지에 가까웠던 서울이, 지금 나에게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생활인으로써 느끼는 서울은 조금은 살벌한 곳이기도 하다. 높은 물가와 생활비, 수많은 인파들도 낯설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바로 서울의 집값이다. 서울의 집값은 10년 전에도 최고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똑똑한 몇몇 친구들은 5년 전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을 해서 서울에 똘똘한 집 한 채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나는 뭘 했나 싶기도 하지만, 살까 말까 고민했던 집을 이제는 살 엄두도 나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당분간은 전세로 살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고민은 뒤로 한 채 서울에 이사 온 후로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기만 하다. 아내와 함께 새로 오픈한 백화점에 다녀오기도 하고, 밥을 먹고 나서 한강에서 산책을 하기도 한다. 10년 전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얼마 전에 <도쿄 여자 도감>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는 일본 시골에서 도쿄를 동경하던 소녀가 상경하여 겪는 성장드라마이다. ‘아키타’라는 작은 도시에 살았던 주인공은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진로 담당 선생님의 질문에 특정 직업이 아닌,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대학 졸업 후 무작정 도쿄로 상경하게 된 주인공은 우연히 동네에서 만나게 된 ‘나오키’라는 남자와 교제하게 된다. 사실 ‘나오키’라는 남자도 ‘아키타’에서 이제 막 상경한 처지로, 둘은 도쿄 생활의 고달픔에 대한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작은 행복을 찾아간다. 그렇게 평범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서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행복이라면 아키타에도 널렸잖아?”
주인공은 연봉이 더 높고, 같은 도쿄 내에서도 더 좋은 곳에 사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고, 이내 나오키와 헤어진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주인공은 더 화려한 삶을 쫓아 마치 환승하듯이 남자를 끊임없이 갈아탔고, 결국 175cm의 키에 연 수입 천만 엔을 버는 30대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도 잠시일 뿐, 너무나 순조로웠던 결혼은 남편의 외도로 막을 내리고, 10여 년 전에 나오키를 처음 만났던 골목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나오키와 재회하게 된다. 그는 이미 가정이 있었고 행복해 보였지만, 주인공은 홀로였다. 그녀는 도쿄의 네온사인 불빛 아래를 외롭게 걸어갔다.
가끔은 인생이 마치 롤플레잉 게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매 순간마다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퀘스트(quest)들이 주어지면, 나는 나 자신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줄 아이템을 모으고, 레벨업을 시도한다. 하지만, 레벨업 순간의 즐거움도 잠시, 나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더 좋은 어떤 것을 소유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한다. ‘이 게임의 엔딩에서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품은 채로.
다만 게임과 인생의 다른 점은, 게임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최선이었으며, 그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I have already arrived.
-틱낫한
틱낫한 스님은 <HOW TO SIT>이라는 책에서, 앉을 때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이 드는 방법으로 앉으라고 하였다. 당신의 도착을 즐기고, 도착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끼라고 한다. 그러면 이윽고 진짜 집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당신의 진짜 집이 지금 여기라는 것을 느끼며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게 자기 최면이든 자기 합리화이든 간에, ‘이대로 좋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아 있는 나날’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만족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좋은 선택이든 나쁜 선택이든 간에,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고, 지금이 바로 그 결과이다.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고 우리는 나이가 들어간다. 설령 그러한 선택에 대해 후회한다고 해도, 어떤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것, 서울에 올라와서 가져야 하는 자세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