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 관한 최초의 기억
쪼들리는 형편에도 줄줄이 딸 셋을 낳은 우리 부모님.
나의 어린 시절은 궁핍했다. 서럽게도 가난했다.
여섯 살 무렵.
내가 다니던 선교원에서는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시즌에 큰 재롱잔치가 열렸다.
나 역시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무대 의상은 검은 쫄바지에 흰 티였다.
그런데 그 흔한 검은 쫄바지가 없어서 나는 팬티가 훤히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신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웃음. 여섯 살이라는 나이는 수치심을 느끼기 충분한 나이였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또 한 번은 부모님까지 오시는 큰 행사였는데 아이들은 한복을 입었다.
한 살 터울의 언니는 곱게 한복을 입었고 나는 옆동네 네 살배기 동생의 한복을 빌려 입었다.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엄마가 옆동네 아주머니한테 한복 꾸러미 보자기를 받아 집으로 들어오던 모습. 한복이 없어서 나만 또 못 입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엄마가 빌려왔다는 한복 꾸러미를 보고 내심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한복은 터무니없이 나에겐 작았다. 저고리는 짧동해서 7부였고 치마는 무릎까지 왔다.
그 한복을 입고 나는 울상이 되었던 것 같다. 고운 한복이었는데 조금만 더 컸더라면.
속상했지만 나는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기에 그 한복을 입고 초록색 쫄바지를 입고
유치원행사에 갔다. 훗날 나는 그런 한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품바공연이었던가, 재래시장의 각설이 공연이었나. 우스꽝스럽게 화장하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입은 한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일은 쇠털같이 많은 날들의 일부였다. 이렇게 가난이 남긴 씁쓸한 기억은 부모님 가슴에도 대못으로 박혀있겠지. 가난했지만 뼈 빠지게 일하며 자식을 길러낸 나의 부모님.
항상 감사했다. 고생하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의 성장과정 순간순간에 부모님을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철부지 아이가 된 것처럼 어린 시절 가난으로 내가 겪어야 했던 창피했던 기억들이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 갔다.
분노의 본질은 ‘가난’이라는 환경이 아니었다. ‘가난’했음에도 자식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펴주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내가 살이 비치고 팬티가 비치는 팬티스타킹을 신고 무대에 올랐을 때
엄마가 미안하다는 말과 나를 한번 꼭 안아줬더라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내가 최고였다고 말 한마디 해줬더라면
그 수치스러운 감정도 싹 사라지지 않았을까.
마음에 쌓인 앙금이 이 결핍이 딸에게 투사되고 있음을 느낀 건
딸의 유치원 입학식 날이었다.
급하게 유치원 입학결정을 내리면서 원복을 준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입학식 당일날 택배사까지 직접 가서 원복을 공수해서 아이에게 입혔다.
남편은 원복 하루 안 입히는 게 무슨 대수냐고 했다.
나는 알고 있다. 남들 사이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축되는지.
내 딸아이는 나와 다르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명절이면 비단 한복을 입히고 친정집에 갈 때마다 예쁜 원피스와 구두를 신겨서
부모님에게 보란 듯이 보여준다.
여섯 살도 예쁜 옷을 좋아하는 나이라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그때의 내가 많이 슬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