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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몽 Oct 11. 2023

첫 직업은 첫 꿈과 함께

직업체험: 패스트푸드점 파트타이머

맥도날드에서 받았던 '크루 배지'

나의 첫 직업은 첫 꿈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히어로가 되고 싶다거나 공주, 아니면 공룡이 되고 싶다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딱히 무언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누구도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또는 '되라든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막연히 아이들과 노는 게 좋고 아이들도 좋아하니까 유치원 선생님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꿈이라는 것이 생겼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되고 싶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못했을 것 같다. 그때는 어떤 용기였는지 '꿈이라는 것이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받고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은 일산에 있는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McDonald)였다. 미국에 다국적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맥도날드는 코카콜라, iPhone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로 알려진 기업이다. 


만 16세 고등학교 1학년 여름즈음 아르바이트 면접을 처음 보러 갔다. 오래된 일이라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이력서를 처음 써봤다.


요즘은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온라인으로 작성해서 메일이나 잡코리아, 사람인 같은 구직 사이트를 이용해서 직업이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에 예전에는 벽에 붙여진 채용 포스터나 구인구직만 있는 벼룩시장, 교차로, 가로수 같은 신문이 구직 사이트를 대신했고, 전화를 하고 종이 이력서를 가지고 매장에 가서 면접을 봤다.


맥도날드 일을 구할 때도 벽에 붙어있던 채용 포스터를 보고 연락했다. 종이 이력서에 손으로 또박또박 글을 쓰고, 얼굴이 자세히 보이는 반명함 사진을 붙인 종이를 가져와 담당 매니저와 매장에서 면접을 보았다. 인생에서 처음 보는 면접이었다. 면접관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나와는 4~5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면접을 보는 매니저님이 얼마나 어른처럼 느껴졌는지. 돌아보면 그들도 어린 나이였다. 함께 일했던 친구들은 나와 또래 거나 많아 봐야 1~2살 정도 많았으며 '크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최저시급을 받고 일을 했다. 맥도날드에서는 캐셔, 그릴, 홀로 파트가 나눠져서 로테이션을 돌았고, 스케줄표와 작업위치가 정해져서 나왔다. 그릴에서 일하면 햄버거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언제나 캐셔 담당이었다.  


벼룩시장, 교차로 신문/ 블로그


     

텔레비전 보는 걸 좋아했기에 애청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했는데 MC 신동엽과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낡고, 어려운 집을 가진 사연자들을 찾아가 이야기도 들어주고 좋은 공간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마법처럼 공간을 바꾸는 것 말고도 '희망'을 선물해 주는 모습을 보며 디자이너가 마법사 같았다. 가슴이 벅찼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희망을 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대학을 디자인과로 가기 위해서 미술학원에 다녀야 했다. 부모님은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셨다. 집안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기에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을 모색했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며 매일 울고, 단식투쟁을 했었다.  처음으로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미술재료비는 스스로 돈을 벌어 사겠다는 제안을 듣고, 부모님은 미술학원에 등록시켜 주셨다. 그렇게 처음 일을 사게 되었다. 

     

내가 일해서 받은 노동의 대가로 처음 물감을 구매했던 순간은 감격스러웠다. 나의 노동이 돈이 되고, 돈이 붓이 되고, 연필이 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는 과정들은 꿈이라는 것에 가까워지는 느낌에 들떠있었다. 주말 아르바이트는 1년 정도 이어졌다.     


맥도날드 매장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좋았던 것은 식사로 맥도날드에 있는 햄버거 세트를 종류별로 골라 먹어볼 수 있는 특혜였다. 그것도 공짜로. 생각보다 햄버거를 먹을 일은 드물었고, 생일이나 되어야 햄버거를 먹으러 갈 수 있었다.


맥도날드는 해피밀 세트가 유명해서 주로 아이들이 생일 파티를 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매장 내에서는 예약을 받아 생일 좌석을 꾸며주기도 했었다. 지금은 워낙 파티룸에 좋은 곳이 많아서 패스트푸드점에서 생일파티를 하진 않겠지만 그때는 유행처럼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했다.

 

일반 고등학생이라면 만나기 힘든 사람들도 만났다. 일명 '진상고객'이라고 일컫는 사람.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진상인지 모른다. 포장되어 나간 음식을 받아간 아줌마 손님이 감자튀김이 눅눅하다며 트집을 잡았다. 봉투를 열어 확인해 보니 멀쩡해 보였다. 막 튀겨 나와 뜨겁기까지 했다. 


"손님, 이상이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아줌마 손님은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내며 계속 바꿔달라고 때를 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감자튀김을 새 걸로 교환해 주었고, 모든 것은 ‘죄송합니다’로 시작하여 '죄송합니다'로 끝났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착각들이 만연했던 시절이라 이런 일들이 당당하게 벌어졌다. 맞는 걸맞다고 말하면 버릇없거나 무례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내 잘못이 아닌 잘못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고, 그걸 서비스정신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뻔히 앳된 얼굴을 한 직원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막말을 쏟아붓거나, 괜스레 화풀이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만만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나 마음에 상처만 받았다.

      

손님들은 주로 ‘어른’이었다. 매니저도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알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고객에게 했었다. 왜 죄송하지 않은 일에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일까. ‘어른’이 되어보니 눈앞에 어린 친구들이 일하고 있다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건가. 그것이 감정노동이었던 것이다.


혹독한 첫 직업의 신고식이 끝났다.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에 아르바이트까지 겹치면서 몸은 계속 피곤해졌고, 학교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학업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이라 서툴렀고, 두려웠지만 설레는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이야 진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가끔은 그 진상이 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은 어른이 되었다. 처음 겪어본 갑질은 억울했고, 무기력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 저자는 "저열한 인간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겐 최소한의 저항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갑질로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할 말은 하고 살아야 병에 안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일을 할 때 스스로의 존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갑질하는 사람들과 일이 서툴러서 힘들었지만, 모두 감내하고 받아줄 수 있던 힘은 처음 시작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대의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게 나를 살게 했다. 맥도날드를 지나갈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열정도 떠오른다. 그 당시 일했던 맥도날드를 지도로 찾아보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신기했다. 


그때의 열정을 다시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아 더 아련하고, 그리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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