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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몽 Oct 19. 2023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직업체험: 무대 조명디자이너

남산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

무대미술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는 꿈을 위해 미술학원에 다니는 나를 보며 부러워했다. 자신은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공부를 하는데 이미 진로를 결정한 나를 좋게 봐줬다. 나도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며 미대입시를 준비했던 선택에 의심 따위는 없었다.      


대학 생활과 배움은 재미있고 신기했다.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조명디자인에 관련된 일 했다. 학교에서 기말 공연을 하거나 극장을 이용하는 연극과, 국악과, 실용음악과, 무용과, 극작가, 문예창작가 등에는 조명이 필요했고 그들을 도와주는 조명 스텝으로 디자인을 했다.     


학기 말이 되면 기말작품이라는 공연을 올리기에 조명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학생들은 두 달 정도의 시간을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기말이 되면 짐을 싸서 극장으로 들어가 숙식하며 일했으니까. 돈보다는 꿈이 먼저라며 열정페이로 일을 했다.


학교 작업을 하면서 아킬레스건이 망가지고, 무대 실링(천장)에서 조명을 설치하고 돌아다니다 머리가 찢어지는 경험을 했다. 유압사다리를 타고 높은 데를 올라가며 벌벌 떨었고, 


비계라는 공사판에서나 있을 법한 사다리를 올라타며 야외 높은 곳에 올라가 조명을 설치하고 포커싱(조명기를 이용해 원하는 곳에 빛을 맞추는 작업)을 하며 2년 동안 일을 배워갔다. 그래도 재미있고, 신비로웠다.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 많은 작품을 올리고, 보기도 했다. 내가 했던 조명디자인은 닐사이먼 <굿닥터>, 안톤체호프 <세 자매>의 무대 조명 디자이너로 기말작품을 올렸고, 장진 감독이 연출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조명 무빙 오퍼레이터로 참여했다.


일도 힘들었지만, 선배들에게 당하는 갈굼도 힘들었다. 1학년은 신입생이니까 잡고, 2학년은 후배 교육 제대로 안 한다고 잡고, 이유가 뚜렷이 없이 잡았다. 꿈이 모든 것들을 견디게 해 주었다.      


이거 아니면, 안될 것 같고, 이것만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보다 사소한 이유로 큰일을 결정한다. 고등학교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저녁시간을 반납하고, 방학도 반납했다.     

 

이제는 현장에 나가서 제대로 된 밥벌이 하면서 살만큼 기술도 익혔었다. 첫 학기에는 장학금도 받으며 생활했었고, 학교 다니면서도 종종 외부에 나가서 크루로 했었다.      


그때는 크루 일당으로 10만 원을 받았다. 요즘은 17만 원이라는데 20년이 지났는데 별로 오르지 않은 슬픈 현실. 여기도 참 박봉이다.      




무대 조명디자이너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특히 조명은 공연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직업이라 배우들처럼 앞에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아도 현장의 떨림과 긴장감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무대 조명의 큐(조명이 켜지는 타이밍)를 누를 때. 그리고 큐에 조명이 바뀌고, 배우의 대사나 움직임에 적절하게 큐가 들어가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흥분은 강렬한 기억으로 몸속에 남아있다. 


무대 조명디자이너라는 직업은 특수한 전문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극단에 들어가서 스텝으로 일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계가 있다. 학교나 교육기관에 들어가기를 추천한다. 학교에서 후배로 들어왔던 사람들을 보면 이미 현장에서는 일을 잘하는 베테랑인데 인맥을 쌓으려고 오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연극 대본의 빛에 대한 대본 분석이 되어야 하고, 색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연출과 많은 이야기를 하는 직업이다. 무대 조명디자이너는 공연하는 극장에서 하는 현장 작업이 많고 변수가 많은 편이니 유연함이 필요하다.     


무대 세트를 고려하고, 연출이 요구하는 것들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명의 근본적인 기능인 배우의 얼굴이 잘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연출의 의도가 얼굴이 안 보이는 게 아니고서는 무조건 시행되어야 한다.


2학년 기말작품을 준비하던 중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왔다. 믿었던 확신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루고 싶었던 꿈이 한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을 걷다가 턱을 보지 못하고 넘어져 다리를 접질렸다. 병원에서 인대가 늘어났다고 말했고, 반깁스를 했다. 한창 기말작품을 하던 상황이었고,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중이었다.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있는데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선배는 화를 냈다.      


“왜 안 와?!”

“다리가 다쳐 반깁스를 해가지고...”     


이후 선배는 막무가내로 학교 극장으로 오라고 말했다. 선배가 말하는 극장은 지하철을 타고 2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다. 이미 밤이 되었고, 다리도 다쳤는데 오라니. 순간 깨달았다. '여기까지... 구나.'     

 

무대 조명디자인을 사랑해서 많은 것을 참으며 감내했다. 얼굴 보고 대놓고 그만두라는 얘기까지도 들으면서도 버텼다. 이 바닥은 좁아서 선배들을 사회에 나가서도 만나고 일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동기들은 졸업하고 현장에서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어떤 동기는 후배인 걸 숨기고 일하기도 했다.     


햄릿/ 온라인커뮤니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 나온 유명한 대사이다. 현재까지 쓰이는 글귀로 매우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사용되는 글귀로 내 앞에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다. 


무대 조명디자인은 좋았지만, 밖에서도 선배들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결국 ‘사느냐’를 선택했고 그곳을 도망치듯 나왔다. 빛이 무엇인지 알겠고, 재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그만두면서 내 몫까지 힘들었을 동기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지금도 만나면 군대 동기처럼 그때 일들을 안주거리 삼으며 씹고 뜯고 맛보고 있다. 2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지냈기에 짧게 지냈지만,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 같다.     


여전히 연극을 사랑하고, 드라마를 사랑한다. 무대 조명디자이너로 밥 벌어먹고 살지는 않지만, 역시 사랑한다. 여전히 연극을 볼 때마다 조명부터 확인한다. 직업병이다.     


이러다가 선배들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이 무서웠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의 변하는 모습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변한다면. 그런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게 된다면. 두려웠다. 사람의 마음을 보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만 보는 비인간적인 모습에 도망쳤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단지 나를 잃고 싶지 않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자신을 지키며 할 수 있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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