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교육을 꿈꾸며
오늘 오랜만에 어린 자녀를 키우는 책 친구를 만나 커피 한 잔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카페 나들이도 오랜만이라 느긋하게 그곳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자녀 얘기로 흘러갔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언급되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제목만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만 하다가 성적이 떨어지면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마는 비운의 학생을 연기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는 1986년 1월 15일 새벽,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중학교 3학년생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그 유서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이은주(이미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난 1등 같은 건 싫은데, 난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이 되기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정말 남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슬픈 것을 보면 울 줄도 알고, 재밌는 얘기를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엄만 언제나 내게 말했어,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엄마, 성적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미워해야 하고 성적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미워해야 하는데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나님 왜 이렇게 무서운 세상을 만드셨나요. 선생님 왜 우릴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살게 내버려 두셨나요.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아이를 갖게 되면, 자신의 소중한 자녀를 잘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잘 키운다는 기준을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가 관건이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우연히 발칙한 교육 칼럼을 보게 되었는데 "학교에 꼭 보내야 하나?"라는 주제였다.
결혼하고도 처음엔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조차 없었고, 아동학을 전공했지만 교육에 특별한 철학이나 관점이 없었던 나에게 그야말로 큰 파문을 일으킨 질문이었다.
Q. 학교엔 왜 꼭 가야 하지?
A. 남들이 다 가니까. 엄마가 가라고 했어.
교육은 의무 아냐? 다른 방법이 없잖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는 전쟁 후 폐허 속에서도 자식 교육엔 모든 걸 걸었던 부모들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공식이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걸까?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 만큼 삶의 질이 좋아질까?" 관심을 갖고 몇 가지 자료들만 찾아보아도 그렇지 못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아이들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마주하기도 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학업문제였다.
또한 가장 오랜 시간 공부하고 기징 불행한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이다.
그렇게 우리나라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하위권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서 미래를 추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험 이외의 것을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자녀 교육에 관해서도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기반으로 범주화하고 그 안에서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교육관은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사회적 양태를 보면서 학습된다. 또는 자신의 공부에 대한 못다 한 결핍을 자녀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종종 주변의 비슷비슷한 부모들의 의견에 자극을 받거나 비뚤어진 경쟁심으로 자녀를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교육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회장은 그런 부모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경향신문과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함께한 공동 캠페인이 있었다.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그 첫 번째 문장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그렇다! 행복도 습관인 것이다.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 김규항은 그의 칼럼에서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두 가지 경로를 ‘관계’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자녀와 함께 고민하는 어른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밝아질 것인가.
우리 부부는 많은 고민 끝에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아이를 데리고 대안학교 투어를 다녔다. 모든 선택은 스스로 결정해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발적이지 않은 결정은 부모의 푸시로 느낄 수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또한, 직접 교육의 환경을 보면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주말에 가끔씩 세 식구가 시골 각지의 대안학교들을 나들이 삼아 다닌 끝에, 아이는 중고등학교를 정규과정이 아닌 좁은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는 시골 깡촌에 위치한 기숙학교였다. 입학 당시에는 비인가 학교였고 지금은 교육부 인가가 되어 검정고시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사실 처음부터 졸업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선택에 있어 우리에겐 그것이 중요하진 않았다.
아이는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도 긴 고민 끝에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대안학교가 모범 답안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이들마다 원하는 바가 다 다르다. 그 아이가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 소통하며 함께 모색하고 찾아나가야 한다. 그때보다 그 길은 더욱 다양해졌다.
지금의 교육 현실은 레밍 쥐들의 질주처럼 위험해 보이는 건 분명하다.
마치 세상 속에 정해진 길이 단 하나뿐인 것처럼 앞만 보고 내어 달리다가 모두 낭떠러지로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안쓰럽다.
부모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자녀의 불안으로 대치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아이들도 고민하고 방황하고 종종 실패하겠지만, 그런 경험을 곁에서 지지하고 응원해 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게다가 그게 부모라면 아이들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