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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덕 Jul 18. 2022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에니어그램, MBTI : 심리 탐구


연애할 때, 남자 친구를 괴롭힐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 뭐 바뀐 거 없어?"


라는 질문 하나로 충분하다.


순간 그 남자의 동공은 흔들릴 것이고, 뇌 속에 저장된 데이터 베이스를 초고속으로 돌려 정답을 맞히려 안간힘을 쓰겠지만, 그 노력은 곧 허사로 끝나고 만다. 대부분의 정답은 무척이나 주관적인 데다 짓궂기까지 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런 스무고개를 할 이유가 없는 결혼 27년 차.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내면을 속속들이 여행하기 전까지는 그 비슷한 고문을 남편에게 계속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991년 12월



대학 3학년 초,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고 그 해 겨울, 대학 친구들 4 총사와 함께 스키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용평에 콘도를 갖고 있던 친구가 숙박을 해결해 줘서 놀러 갔지만 스키를 탈 줄 아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이었다.


마침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스키 캠프'에 몇 번 다녀왔던 터라 우리 중에서는 가장 스키를 잘 타는 사람이었다. 친구들 중 두 명은 생애 첫 스키라 리조트의 강습을 받은 후 합류하기로 했다.


초보 한 명은 만능 스포츠인으로 스키도 금방 배웠다. 문제는 다른 한 친구였는데 아무래도 반나절 강습으로는 가장 낮은 슬로프에서도 안전하게 내려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남친에게 특별 임무를 지시했다. 친구 K에게 강습 과외를 해서 좀 더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우라고 말이다.


한참 연애 초였던 남친은 내 말을 철석같이 이행했다. 본래도 원리를 터득하고 그 터득한 내용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남친은 K에게 미끄러운 눈밭에서 균형 잡고 내려올 수 있도록 기초를 잘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이 알아서 스키를 타고 있는 동안, 정말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K만 가르치고 있는 남친. 아무리 A를 말하면 A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여자 친구를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슬슬 기분이 상한 나는 저녁 먹는 내내 친구들에게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에게는 쌀쌀맞게 굴었다. 눈치가 없기로는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었던 남친은 그 조차도 잘 모르다가 한참 후에야 나에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내가 거기서 뭐라고 말하랴. 으이구.

나머지 일정 동안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서슬 퍼런 여자 친구의 비위를 맞추느라 벌을 서며 시간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는데, 나는 뭔가 기분이 상하면 무표정해지면서 말이 없어졌고, 남편은 그럴 때마다 "무슨 일 있어?"라며 자꾸 말을 시켰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 복잡한 마음을 먼 곳으로 피신시키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외향형과 내향형, 혹은 사고형과 감정형은 문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 첨예하게 다르다. 나는 내향 감정형. 남편은 내향 사고형이다. 내향형은 똑같지만, 그리고 심지어 직관형, 판단형까지 같지만, INTJ와 INFJ는 완전 다른 족속이다.


내향형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은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나는 내 '감정'의 속살을 다른 이들에게 선뜻 내보이지 못하고 내밀한 곳에 숨겨두고 곱씹는다. 남편은 판단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 있으면 동굴로 들어가 혼자만의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또 다른 성격 탐구 방법으로는, 무의식 속의 “고착”으로 서로의 기질을 분류하는 '에니어그램'이 있는데, 여기서도 남편은 '사고형' 나는 '감정형'이다. 남편에겐, 미래의 불안 요소를 미리 대비해 놓는 것이 중요한 삶의 동기라면, 나는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타인에게도 인정받기를 바라는 유형으로 '자아 이미지'가 무척이나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 1195798, 출처 Pixabay




다시 대학 스키장 사건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 내 마음은 이랬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자아 이미지’로 자부심을 느끼는 나는, 내 남자 친구가 친구 K에게 친절을 베풀며 능력자로 역할을 다하길 바랐다. 그런데, 미션을 수행하느라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K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괜스레 샘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으매도 질투를 느낀다는 건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졌다.



MBTI로는 "내향 감정형"에다 에니어그램으로는 "이미지"가 중요한 유형인 나는, 그러한 감정들을 도저히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만큼 가르쳤으면 잘했어. 이제 나랑 스키 타자."

라고 했으면 간단한데, 그걸 말 못 하고 속을 끓였다.



그렇게 자기모순에 빠진 나는 그에게 괜스레 심통을 부렸다. 그가 내 마음속을 알 리 없으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자꾸 물었다. 혼자 불러내서 조용히 물어도 말할까 말까인데... (아니. 당시엔 당연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꾸 친구들 있는 데서 묻는다.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냐. 왜 그러냐 ㅠㅠ. 나는 "내 이미지"가 손상될 게 뻔한 대답은 뒤로 미루고, 아무 일 없는 듯 가면을 쓰고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간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 못한 채 내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명 받은 대로 다 해주고 벌은 벌 대로 받고. 타인의 감정에 둔한 그에게는 뭔 일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관계에서의 문제를 겪으며 비로소 "나"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로 떠난 내면 여행은, 내 속에 자리했던 자의식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 주었다. 처음엔 바라보는 것조차 가슴 아팠지만 그걸 인정하고 나니 상처들이 서서히 아물었고, 그제야 타인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내 안에 자리한 심리적 패턴을 이해하고 나니, 가까운 사람들의 패턴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약한 고리가 있다.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의 '이미지'에 관심이 없다. 그 모든 건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 낸' 두려움이었고, 타인들도 각자 타고난 기질대로 무언엔가 발목을 잡힌 채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듯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각자가 사용하는 프레임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지레짐작 넘겨짚게 되면 수시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남편이 꼬치꼬치 물을 때마다 나는 생각했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그냥 알아줬으면 했다.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면서 상대는 한눈에 척 알아줬으면 했다.




심리 도구들을 찾아 공부하면서, 이제 가족뿐 아니라 지인들에게까지 "에니어그램" 전파하고 있. 그걸 통해 무의식에 자리한 각자의 고착을 알고 나니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상대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언지 아는 것만으로도 그를 존중하며 질문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마음을 열고 노력할 수는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서로를 성장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응. 말해 줘.

그래야 조금이나마 너를 알 수 있어."




이제 나는, 내 마음의 미세한 불편함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상대방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땐 더욱 그래야 한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은 길고 긴 시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 "내면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사로잡혔던 굴레를 벗어나니 비로소 나에게도 날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 devintavery,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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