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만 아는 둘 사이 역동
나이 반백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는 아버지를 "아빠"라 부른다. '아빠'라는 호칭에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글 속에서 '아빠'라고 하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지금도 문자나 통화를 할 때면 여전히 "아빠~~"라고 하는 걸.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느 날이었다. 화를 내거나 혼내는 법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이 무슨 말썽을 피웠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여하튼)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할 상황이었고, 우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꿀밤을 주려고 주먹을 쥐셨다. 그런데, 눈을 질끈 감은 우리 머리를 주저주저하며 톡 건드리시더니 이내 주먹을 푸시는 게 아닌가. 좋은 말로 뭐라 타이르셨는데, 그때 아빠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히질 않는다.
꿀밤조차도 때리지 못하셨던 아빠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성품인데 반해, 울 엄마의 별명은 "깡패"였다. 음색 깡패도 비주얼 깡패도 아닌, 짐작하듯이 성격이 불같은 깡패. 그런고로,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아빠가 퇴근하기 전 낮 시간 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지금도 엄마의 언어폭력은 변함이 없지만 결혼을 한 이후로 마주할 빈도가 많이 줄었다. 신체적 폭력은 사춘기를 겪으며 한풀 꺾였지만 완전히 면제받은 건 대학 입학 이후였다.
얼마 전, 아버지의 86번째 생신이었다. 나는 친정 엄마와 또 한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빠의 중재로 무사히 예정했던 가족사진을 찍고 함께 식사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집 거실에 놓인 시댁 쪽 가족사진을 볼 때마다, 친정에는 그런 사진이 없다는 게 자꾸 마음에 밟혔고, 장수 사진이라 불리는 부모님의 '영정 사진'도 미리 찍어 놓고 싶었다.
지난 토요일, 찌는 듯한 더위가 지속되던 주말, 친정 부모님을 라이드 해서 동생 가족과 사진관에서 만났다. 남동생 네도 우리도 각각 아이가 하나씩이라 모두 모여도 단출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천진무구한 엄마는 나에게 눈썹을 그려달라고 하셨다. 눈썹을 그리는 동안에도 가만히 계시는 법이 없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반복된 잔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때도 아버지는 평소처럼 한쪽에 마련된 간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요히 눈을 감고 계셨다. 평소처럼 예의 입을 일자로 다문 그 표정으로, 꼭 필요한 말씀 이외에는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앉아 계셨다. 부부는 그런 법인가?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서둘러 가족사진을 찍었다. 벤치 의자 중앙에 부모님 두 분이 앉으셨고 그 곁에 외손녀와 친손자가 함께했다. 남동생 내외와 우리 부부는 그 뒤에 서서 가족을 감싸며 포즈를 취했다.
다리를 모아서 가지런히~
한쪽 팔은 자연스레 팔짱을 끼시고
다른 손은 무릎에 살짝 주먹 쥐듯이 자연스레 툭 떨어뜨려 놓으시고요,
고개는 들어서 살짝 턱을 당기고 눈은 크게 뜨세요~
자 찍을게요. 웃어보세요. 좋아요.
아.. 아버님, 안경을 알 없는 걸로 드릴까요?
빛이 반사되네요.
그렇게 가족사진을 찍고는, 두 분의 영정 사진도 차례로 찍었다. 옷을 매만져 드리고 자세 고치는 걸 도우며, 새하얀 백발에도 아직은 건강하심에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렸지만, 엄마를 대할 때와 아빠를 대할 때 내 마음의 온도차는 확연했다.
누구와 싸워서 져 본 적 없는 엄마.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담장을 빈번하게 넘었고, 그런 엄마는 나의 수치심의 근원이었다. 기질이 정반대인 아빠는 그런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 부부가 오래도록 잘 살아오신 비결은 당연히 성인군자 같은 아버지가 참아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런 엄마가 야속해 톡톡 쏘는 소리를 하면 아빠는 번번이 엄마 편을 드셨다. "그래도 엄마가 아끼고 모으고 악착같이 살아서 지금 우리 집이 있는 거다. 엄마는 앞에서 성질이 욱욱해도 또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지 않니. 너희 엄마가 나이가 들어도 명랑해서 집안에 생기가 돌아. 맨날 아프다고 누워있어 봐라."
나는 그런 소리를 모조리 무시하고 흘려보내 왔었다. 그냥 아버지는 좋은 사람. 엄마는 나쁜 사람. 그래도 내 엄마니까 딸의 도리는 해야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예전엔 무심코 지나쳤던 아빠의 표정에서 무언가 다르게 감지되는 것이 있었다.
영정사진 여러 컷 중에서도 베스트 샷을 추려내는 중이었다. 사진에 감각 있는 손주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그 뒤에 서서 사진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아빠는 엄마의 사진을 추리는 중에 '조금 개구진 표정'의 엄마 사진을 보고 "너네 엄마 좀 봐라" 이러면서 활짝 웃으시는 게 아닌가! 늘 변함없이 일자로 다문 입술에 무표정으로 눈 감고 계시는 모습이 대부분인데 가끔 그렇게 활짝 웃으신다.
가만있어 보자. 아빠가 언제 또 이런 표정을 지으셨지? 생각해 보니 아빠의 웃음 옆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종종 엉뚱한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스런 말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 나이가 몇인데 철없다며 마음속으로 나무라고 있어서 아빠의 표정을 놓쳤던 것이다. 맞아! 아빠는 그럴 때마다 활짝 웃고 계셨다. 음.. 그 표정의 의미.. 그건 뭘까?
아.. 아빠는 엄마를 귀여워하고 계셨구나!!
나는 왜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로서는 노처녀였던 29살의 아가씨와 31살의 노총각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지 55년. 그 세월 동안, 서로가 쌓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결이 다른 두 사람은 무수히 많은 드라마를 썼을 것이다. 수없이 다투었을 테지만 집안의 문제는 또 합심해 해결했을 것이고... 두 남매를 키운다는 것도 녹녹지 않았을 테지.
내가 생각해온 '폭군 엄마'라는 이미지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더 증폭되어 마음에 각인되었지만, 엄마에게 그런 점만 있었을 리는 없다. 아빠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 지금도 여전히 지독한 잔소리로 성인군자 아빠를 가끔 역정 나게 하지만 말이다.
역시 부부 관계의 역동은 둘 밖에 모르는 법이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나의 프레임 안에 든 모습이었고, 아빠는 다른 프레임에 엄마를 곱게 앉혀 놓고 계셨다. 내가 알던 게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에 그동안 엄마에게 잔소리 폭격을 받으며 살아오신 아빠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거둬들였다.
이제 두 분 '장수 사진'도 찍으셨으니 오래오래 사이좋게 건강하게 사시길! 다른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