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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유럽자동차여행] Day 15

근로자의 날을 맞이하는 백수의 자세

2019년 5월 1일


백수가 되기 전 우리부부는 여느 직장인처럼 5월을 기다렸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로 시작해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 까지 휴가를 조금만 쓴다면 길게 쉴 수 있는 황금연휴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휴가 끝나는 날이면 쏜살같이 지나간 연휴가 아쉬워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긴 연휴 끝에 출근하면 수백 통씩 쌓인 이메일과 그에 비례하는 피로가 동반됐지만 그래도 몇 일을 연달아 쉴 수 있다는 건 달콤했다. 

    

백수가 되어 맞이한 ‘근로자의 날’은 여행지에 관광객들이 많아져 복잡해지는 날이 됐다. 이탈리아 친퀘테레근처의 캠핑장에도 연휴를 맞은 유럽인들의 캠핑카들로 북적였다. 친퀘테레여행을 마치고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우리 텐트 옆 자리에서 럭셔리한 캠핑카로 여행하던 부부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캠핑장에 도착한 날 우리가 부산스럽게 텐트를 설치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세상 평온하게 캠핑카 안에서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으셨던 분들이다. 루돌프 아저씨와 안토니아 아주머니께서는 네덜란드에 살고 계신데 슬하에 딱 우리 나이 또래의 세 자녀가 있다고 하셨다. 3주간의 휴가를 맞아 캠핑카로 독일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신다고.


근로자의 날을 맞아 캠핑장에도 많은 유럽인들이 캠핑장을 찾았다.

     

네덜란드에서는 부활절을 전후로 3주의 휴가가 있고, 여름에는 무려 6주의 휴가가 주어진다고 한다. 이미 ‘9주 휴가’에 충격을 받아 차마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크리스마스에서 연초까지 또 휴가가 있을 터. 그렇다면 거의 두 달 이상의 휴가가 주어지는 것이다. 유럽이 우리나라에 비해 근로자 휴가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퇴사하면서 여행이 끝나면 다시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어졌는데 네덜란드에서라면 다시 회사원이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휴가가 차고 넘치는 분들에게도 우리가 차를 빌려 세 달 동안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건 자못 신기해 보였는지 ‘우리가 한국에서 하던 일’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다. 사실 유럽여행이 전부가 아니라 이미 아시아여행을 다섯 달했고, 유럽 다음엔 아프리카로 넘어갈 것이며 그 후 아메리카대륙까지 돌기 위해 ‘퇴사를 했다’고 이실직고했다. 


노천카페에서 여유롭게 마시는 라떼 한잔. 근로자의 날을 맞은 백수는 여유롭다.

    

이렇게 휴가가 많은 분들도 우리 나이 또래의 자녀가 있기 때문인지 ‘대단한 결정’이라고 외치셨다. (정확히 말하면 ‘crazy but great decision’, 미쳤지만 최고의 결정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퇴사를 하고 세계여행을 떠난 것은 휴가천국에서 살고 있는 유럽인들에게도 파격적인 행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문득 이 ‘미친 결정’을 내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친구들 대부분이 하지 않는 걸 우리는 선행(?)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것도 유럽인들보다도 더 먼저. 선행학습은 좋은 게 아니겠는가. 

    

백수가 되어 맞이한 근로자의 날. 연휴가 끝나도 우리에겐 돌아갈 사무실이 없다. 하지만 여행 이후의 돌아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불안감보다는 우리의 찬란한 30대 초반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만족감이 훨씬 크다. 백수가 되어 처음으로 맞이한 근로자의 날, 우리에게 연휴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긴 연휴'가 다시 한 번 소중해지는 시간이었다.


어제 저녁 와인과 곁들일 안주로 딸기를 씻으며 조금 나눠드렸는데, 그걸 잊지 않고 우리에게 네덜란드산 치즈를 선물해주신 안토니아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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