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주는 위로

by 세둥맘

여행을 가서는 모기를 비롯한 벌레들 때문에 무서워서 밖에 나가질 못했다. 모기기피제를 온몸에 잔뜩 뿌리고 테라스에 나섰다. 펜션 테라스는 멋진 뷰를 선사했다. 강물이 저만치 멀리서 흘렀고 강 너머에는 겹겹이 둘러싸인 산이 있었다.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지형이었다.


모두 잠든 새벽에 혼자 깨어있다는 것은 일종의 짜릿함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 고요와 정적 그리고 상쾌함을 오롯이 나 혼자만 누릴 수 있다는 묘한 특권의식을 맛볼 수 있다.


어젯밤에 비가 온 뒤 잠시 개인 날씨 탓인지 산에는 운무가 짙게 끼어 있었다. 명상 중에는 '멍 때리기 명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운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만을 몇 십분 동안 보고 있었다. 간 밤에 내린 비가 씻겨내린 탓인지 나무들과 들판은 선명한 초록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행을 와서도 남편과 딸들과 부딪히며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계속 귀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었다. 그 전날은 쿵쾅 소리가 최고조를 달하는 듯했다. 나는 레스토랑과 고깃집 등 먹방 투어를 떠나고 싶었지만 게으른 남편은 여행을 와서도 펜션에서 주야장천 티브이만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좁은 펜션에서 계속 투닥투닥 거리며 싸우는 중이었다.


초록초록을 보면서 멍 때리고 있자니 내 마음이 고요히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일상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떨쳐버리고자 떠난 여행에서 맞닥뜨리는 또 다른 스트레스가 조금씩 운무와 함께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색(色)을 이용한 심리치료 방법인 컬러테라피에서도 초록색은 교감신경을 안정시켜 긴장완화, 혈압하강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눈이 피로하고 심리적 불안감이 느껴질 때 도움이 된다고 한다(출처: 아래 참조).


끝없이 펼쳐진 초록초록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상의 소설 한 구절이 생각난다.

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지구 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이상의 권태)


작가가 부르짖은 끝없이 늘어진 초록의 단조로운 권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에게는 한없는 평안함과 위안을 주었다. 평안함과 위안이 조금만 임계치를 넘어서면 바로 권태로 넘어서는 것일까? 평안함과 권태는 종이의 양면과도 같은 건 아닌지?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3/20180323010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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