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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땅 Apr 30. 2021

알아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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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프놈펜에 위치한 한 국제기구의 수장을 맡고 계신 한국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타 기관의 UNV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까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했는데, 그분의 애정 어린 조언 중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UNV는 경력이 아니라는 것. UNV는 명칭이 정확히 알려주듯 Volunteer이고, Volunteer로 일한 기간은 경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Volunteer로서 일한 기간이 1년이 됐든 2년이 됐든 그다지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할 것이며, Volunteer로 이 나라 저 나라 옮겨 다니며 계약을 연장해 나가는 건 (현 UNV 정책상 International UNV는 4년까지 가능) 커리어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UNV 경력을 어떻게 볼지는 기관이나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UN 시스템 내에서는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니 사실 좀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UNV 경험이 이후의 채용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UNV를 통해 일단 UN 시스템 안에 들어오게 되면 UN 시스템 안에서만 공유되는 채용정보를 수시로 받게 되고, 계약이 끝난 후에는 기관이나 조직의 예산 여력이나 상황에 따라 짧게는 3개월이나 6개월 정도의 Consultant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다. 보통 10 중 1명 정도에게 이런 기회가 온다고 하는데, 이를 시작으로 다시 단기 consultant로 계약이 연장되거나 좀 더 나은 정규 포지션으로 흔치 않지만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P-2 등의 정규 주니어 직급(JPO 동일)으로 바로 채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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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러닝 세션(Friday Learning Session)이 있는 날. 


며칠 전부터 단체메일로 공지가 왔고, 주제도 '캄보디아 의전(Cambodian Protocol in provision of hospitality)'이라 나도 한 번 배워보면 좋겠다 싶어 교육장소로 향했는데... 


준비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앉아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가 오늘 교육은 캄보디아어로만 진행된단다. 공지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이미 사회자는 캄보디아어로 진행을 시작했고, 다시 둘러보니 외국인은 나를 포함 둘 밖에 없다. 영어로 이러이러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어디서 본 듯한 한 친구가 저 멀리서 내 옆에 앉은 친구에게 '네가 통역해야겠다'라고 한마디 던진다. 당황해하는 옆 친구 모습을 보면서, '나는 괜찮다' 하면서 자리를 일어나 나와버렸다.  


사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곳에서 지난 10개월간 소수자인 외국인으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섭섭하고 실망스러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현지 직원들의 이런 배타성이었다. 아무리 필드에 있는 국가사무소이고 현지 직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나름 다들 이 나라 최고 대학을 나왔거나 해외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고, UN에서도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같은 팀에 외국인이 있어도 현지 직원들끼리만 현지어로 업무 관련 정보를 주고 받고, 옆에 외국인이 앉아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길 한다. 먼저 묻기 전에 알려주는 법이 없고, 단체 미팅에 외국인으로 혼자라도 끼게 되면 영어로 진행을 시작하긴 하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현지어로 바뀌고 나한텐 먼저 가도 된다 한다. 가끔은 업무를 하고 있는 내 책상을 빙 둘러쌓고 자기들끼리 현지어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도대체가 '배려'란 걸 알기나 하는 건지. 처음엔 무슨 이야기냐 묻기도 하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젠 그냥 자리를 떠버린다.  


이 곳에 오기 전엔 내가 반대의 입장에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작은 국제단체였지만 한국인이 다수인 상황에서 난 가능한 많은 내용을 옆에 있는 외국인 동료에게 통역해 전해주었고, 그럴 수 없을 경우엔 먼저 양해를 구했다. 


웃긴 건 외국인 상관이 옆에 있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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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 곳에선 나만 아는 묘한 장면이 하나 연출됐다. 


UNDP 뉴욕본부의 한 팀에서 캄보디아 봉제산업의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해 진행한 NAMA(Nationally Appropriate Mitigation Actions: 국가적정감축행동) 프로젝트의 최종보고회가 열렸는데, UNDP 캄보디아사무소에선 포컬 포인트(focal point)를 맡고 있는 '나'를 제외하고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보고회는 같은 팀이 라오스에서 진행한 NAMA 프로젝트(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농촌 전력화) 관련 인사들도 참석해 남남협력(South South Cooperation)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양국의 관계 부처 국장급 인사들도 대표로 참여하였는데, 뭔가 민망했다.


이유는 본부의 팀이 국가사무소와의 긴밀한 협의도 없이 처음부터 일을 시작했고, 프로젝트 실행 과정에서 두 번의 현지조사를 각각 2박 3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 진행하긴 하였지만 사업 대상인 캄보디아 봉제업체들과 제대로 된 협의 한번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 본부 팀은 로컬 컨설턴트를 통해 충분히 커뮤니케이션했다고 했지만, 우리 프로그램 담당 책임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봉제업체들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으면 최종 NAMA 프로젝트 제안서를 '승인(endorsement)'하지 않을 것이라 공언했다. '승인'이 왜 필요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종 프로젝트 제안서가 나오고 여기에 돈을 댈 공여자(donor)가 나타나면 결국 프로젝트 실행에 관여하게 되는 건 본부가 아니라 국가사무소가 된다. 


그렇게 해서 보고회에 캄보디아 봉제업협의회를 비롯 여러 업체들이 초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오후 UNDP에선 캄보디아 봉제업협의회와 여러 업체들을 초청한 별도의 협의회가 열렸다. 오전의 보고회가 양자 간 남남협력이란 성격이 강해 민간업체들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듣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 그래도 동일한 대상자들을 비슷한 성격의 미팅에, 그것도 같은 날 다른 장소로 초청하는 게 영 찜찜했지만 여러 정황상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본부 팀의 컨설턴트는 다시 한번 발표를 해야 했고, 프로그램 담당 책임자는 봉제업체 대표들과의 생산적 토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과는? 프로그램 책임자는 만족했고 몇 가지 인사이트(insight)도 얻었다고 했다. 반면 컨설턴트는 여전히 별도의 미팅이 왜 필요했냐는 표정. 결국 문제는 뉴욕에서 온 팀이 국가사무소와의 제대로 된 협의나 진행상황 업데이트도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것이었고, 우리 대표는 그런 프로젝트 결과물을 본인 확신 없이 책임질 수 없다는 거 아니었을까? 국가사무소에서 본부 사람 더러 현지 상황 모른다고 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여긴 그나마 국가사무소 파워가 더 세 다행이다.


어차피 NAMA 프로젝트 제안서는 제안서일 뿐이다. 확보된 예산이나 공여자도 없다. 공여자가 나타나면 공여자가 양자기관이냐 다자기관이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요구되는 조건에 따라 제안서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두 미팅에 모두 참여하고 오후 협의회를 개최한 사람으로서 사실, 두 미팅의 협의내용에서 큰 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오후 미팅에 영어가 가능한 참석자가 많아 인사이트(insight)를 더 많이 얻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 단계에서 딱히 필요했던 미팅이라 말하긴 힘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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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 캄보디아 인권단체인 LICADHO (Cambodian League for the Promotion and Defense of Human Rights)는 "On Stony Ground: A Look into Social Land Concessions"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내용인 즉,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캄보디아 내 빈곤퇴치를 목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거나 가난한 캄보디아인들(3,000 가구 대상)에게 농업 및 거주 목적의 토지를 나눠주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한 토지 배당(Land Allocation for Social and Economic Development: LASED)"이란 사회적 토지 양허(Social Land Concessions: SLC) 사업을 2008년부터 2015년 3월까지 실시하였는데, LICADHO가 사업대상 지역(8개 SLC) 전체에 대해 현지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공된 토지의 대부분이 토질이 좋지 않거나 산림지역과 겹쳐 농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고, SLC 경계지역에선 소유권 분쟁마저 일어 사업이 당초 목적(turning some of Cambodia's poorest families into prospering landowners) 달성에 실패했다는 것.


이런 LICADHO의 조사 결과와는 달리, 사업을 지원한 세계은행(11.5백만 달러)과 GIZ(1.2백만 달러 상당의 기술원조 제공)에서 발행한 그간의 보고서는 긍정 일색. 세계은행과 GIZ는 위와 같은 LICADHO의 보고서 내용에 대해 코멘트 해달라는 요청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으며, 보고서 발간 이후인 6월 26일 세계은행은 LICADHO 보고서에 대한 언급은 없이 사업의 긍정적 성과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특집기사를 웹사이트에 올렸다. 


과거 세계은행은 자체 지원한 토지소유권 관련 프로젝트가 벙깍(Boeung Kak) 호수의 매립 및 개발과정에서 캄보디아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강제 퇴거된 주민들의 인권유린을 방치했고 그들의 주거권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는 지적에 따라 2011년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신규 펀딩을 중단한 바 있는데, 현재는 위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탕으로 2단계 추가 지원을 통한 신규 펀딩 재개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세계은행이 당초 신규 펀딩 재개의 조건으로 내걸었듯 강제 퇴거된 주민들에 대해 캄보디아 정부가 제대로 된 해결방안을 제시한 적도 없고,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LASED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게 아니라, 그냥 캄보디아 사업을 다시 하고 싶은 거겠지? 


벙깍호수는 워낙 여기저기서 비판이 많아 신규 펀딩 중단이란 초강수를 두기는 했었겠지만. 세계은행뿐만 아니라, UNDP도 정말 제대로 된 사업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돈이 있어 사업을 하는 건지 가끔은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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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개편에 이은 새로운 변화, 변화의 원인은 역시나 'money'다. 


UNDP 내부에서는 "UNDP is not a donor any more, but a development partner"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는 새롭게 변화하는 개발재원 지형(development finance landscape)의 변화 때문이다. 


과거 UNDP 예산의 2/3가 core funds (대부분이 OECD-DAC 국가들로부터 나옴), 1/3이 non-core funds로 UNDP의 자체 우선순위 및 판단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면, 현재는 전체 예산의 2/3가 non-core funds, 1/3이 core funds로 파트너십이나 협력을 통해 UNDP가 적극적으로 외부에서 발굴하고 끌어와야 하는 돈이 많아졌다. 


슬슬 컨설팅회사 비슷하게 되어가는 건가? 


이에 따라 UNDP는 작년 Strategic Plan 2014-2017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 뉴욕 본부 및 지역사무소 수준에서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10%에 달하는 인력(약 170여 명)이 자리를 잃게 되었고 본부 및 지역사무소 간 직원 비율도 과거 60:40에서 40:60 (현장성 강화)으로 조정되고 있는 중이다. 


재미난 건(?) BoM (Bureau of Management) Restructuring으로 일컬어지는 구조조정이 완료되고 나서 UNDP 관리자들이 깨달은 건 또 한 번의 구조조정이 더 필요하다는 것. 구조조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BoM Restructuring 2.0이 시작되자 직원협의회(staff council)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직원협의회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된 서베이(반대 84%)를 근거로 UNDP 총재에게 이의 중지를 공식 요청하였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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