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의 위엄
최근 울산 주상복합 아파트 아르누보 화재사건이 화제다. 33층 초고층 아파트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 사진과 영상을 볼 때마다 정말이지 아찔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자다가 식겁했을 주민들의 상황이 남 얘기 같지가 않아 자꾸만 뉴스를 검색하게 된다. 재빨리 출동한 소방관들과 침착한 주민들 덕에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끝난건 정말이지 천운이다.
이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내 가슴을 쓸어내렸던 사건이 떠올라 몇 자 끄적여본다. 며칠 전 아이들을 재우고 나홀로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옆집인지 밑집인지 체감상 아주 가까운 곳에서 화재경보음(파이어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에 이사온 지 이틀만에 아침 댓바람부터 세차게 울려데던 알람에 밥먹다말고 애들 들쳐안고 건물을 탈출했던 안좋은 기억이 있는 바 오밤중에 또 액션을 취해야 하나 혼자 똥마련 강아지처럼 이리갔다 저리갔다 동정을 살폈다. 삼겹살을 구울 때도, 스테이크를 구울 때도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알람이기땜시롱 괜시리 액션을 취했다 후폭풍만 클 수 있기에 일단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아침 파이어알람 사건 이후 한동안 딸래미는 외출복을 입고 잤다. 언제 밖으로 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집앞에서 놀고있던 젊은애들 무리가 날 보더니 “너 지금 나와야돼! 느네 밑에집에서 연기나!!”라고 얘기하는게 아닌가. 갑자기 급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불나면 바로 출동...이 아닌 바로 노트북을 펼쳐 기사를 써야하는 소방청 출입기자였다. 숱한 화재사건을 취재하며 불길이 얼마나 순식간에 번지고 단 몇 초 사이에 생사를 갈라놓는 두려운 존재인지를 봤기에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머릿 속에 펼쳐졌다. 일단 오빠를 깨우고 관리소에 전화를 했다. 근데 직원 말이 자기네들은 911에 직접 전화할 권한(?)이 없다며 꼭 주민이 911에 전화를 해야한단다. 말이야 방구야...결국 그 직원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알아먹고 이러이러 저러저러한 이유땜에 911에 전화는 내가 해야 한다는 얘기만 확인하고 끊었다.
911에 전화를 걸? 말아?
아...영어도 짧은 내가 911에 전화하는건 좀 거시기한데...우리집도 아니고 불나는거 확인도 안했는데 괜히 신고했다가 나중에 돈이라도 내라하면 어쩌지? 별 생각을 다하다 알람이 울린지 20분이 넘어가니 일단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소방서는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과 그칠 기미를 안보이는 경보음에 대한 빡침 등이 뒤섞여 결국 나도 모르게 911 버튼을 눌렀다. 남편은 도대체 니가 왜 전화를 거냐며 오지랖이 태평양이라는 핀잔을 줬지만 말이다. 예상과 달리 아주 아리따운 목소리의 여성 분이 전화를 받았고 상황설명과 아파트 이름을 대자마자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오분도 채 안되서 소방차가 왔다 ㅋㅋㅋㅋㅋㅋㅋ이게 머라고 뿌듯함?! 소방차 소리에 또 득달같이 나가서 카메라부터 켠 나는 또 뭐임?ㅋㅋ결국 소방차가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오밤중 원인 미상의 파이얼알람은 꺼졌고 다시 평온한 밤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 감사, 또 감사했던 밤이었다.
사이렌의 나라, 미국
그러고보면 미국에선 경찰차와 소방차, 엠뷸런스가 내는 사이렌 소리가 유난히 자주 들린다. 특히 운전하다보면 사이렌 켜고 다니는 이들에게 말 그대로 홍해를 가르듯 길을 내주는 일을 자주 경험한다.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자주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굳이 역주행까지 해서 달릴 만큼 반대차선이 막히지도 않았는데도 역주행오는 경찰차에 제대로 길을 내주지 않아 쌍욕(?)을 먹었던 슬픈 기억도 있다. ㅠ 운전 센스가 제로인 나로서는 이제 어디서 사이렌 소리만 들리면 쫄기부터 한다. 으아아악!!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오히려 남용이 의심될 정도로 이 곳의 공권력은 무서울 만큼 권위가 있다. 특히 소방관들을 향한 존경과 그에 걸맞는 대우는 한국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소방조직을 취재하면서 가장 놀랐던 건 대형 화재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든 국민들이 칭찬을 마다않는 소방관들의 처우가 너무나도 형편없었다는 점이었다. 매 순간 목숨을 걸고 화재를 진압하는 대가로 받는 생명수당은 고작 10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책정됐고 그마저도 기본급은 같은 직급의 일반 사무직 공무원보다 적었다. (2018년 기준이니 지금은 좀 올랐길 바란다) 중앙정부가 아닌 각 지방정부(시도지사)에 인사와 예산권이 있는 탓에 사고만 안터지면 티가 안나는 소방관 수를 늘리기보단 시도지사 본인의 재임기간 중 티나는 일에 돈과 사람을 더 투입한다. 결국 소방인력은 만성 부족에 시달린다. 대형사고 터질 때마다 이 문제는 도마 위에 오르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기 부지기수다. 이런 점에서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이 많아져야 한다. 지금은 단 한명 ㅠ
이뿐이랴. 공짜인 구급차를 악용해 택시마냥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몰상식한 사람들부터 심지어 등산하다 피곤하다고 소방헬기를 띄운 국회의원 에피소드까지...소방관들의 삶을 조금만 깊이 알면 자기 자식이 소방관 된다고 하면 가방 싸들고 다니면서 "소방관 말고 경찰관 하라"고 말릴 거라는 담당자들의 말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나마 작년에 평생 숙원이던 국가직으로 전환되며 숙원을 이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런걸 보면 미국은 다소 투박한 구석은 있지만 상식과 기본을 지키며 원리원칙을 중시한다. 어딜 가도 손에 닿는 거리에 위치한 Emergency 버튼과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되는 화재예방시스템, 개인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지만 법을 어길 경우 막 100년형씩 때려버리는 법의 위엄. 물론 오만 인종이 뒤섞이며 별의별 기상천외한 일들이 매일같이 터지는데다 총기소지와 마약이 자유로운 이 나라를 컨트롤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리라. 하지만 소방관을 개인 집사처럼, 경찰을 짭새로 부르며 그 위엄을 경시하는 일부의 몰상식한 우리네 문화가 배워야할 점은 분명 있다. 오죽하면 장관이 기자회견을 자처해 제발 제복공무원들을 존중해달라고 호소할까. 미국의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문화, 이것만큼은 우리가 취해야 하는 선진국의 모습이다.
911부른 얘기하다 너무 멀리 와버렸네?ㅋ 암튼 소방관 형님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