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운다는 것
보스턴은 가을의 초입이다. 기나긴 겨울 눈과의 싸움을 해야하는 이곳은 그에 따른 보상이라도 해주듯 찬란하게 아름다운 여름과 가을을 지난다. 특히 다른 미국 지역들과는 달리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이 곳은 좀 더 유럽스러운 느낌이 있다. 어느 곳에 카메라를 갖다대도 그림엽서다.
비록 코로나 시대지만 이 아름다운 가을을 지나칠 수 없다는 일념 하에 하루에 한두번은 꼭 산책을 나가는데 오늘은 나와 24/7 샴쌍둥이 체제인 8살, 4살 남매와 함께했다. 둘째가 아침에 너무 열심히 놀았는지 유모차를 태우자마자 잠이 들었다. 이게 웬떡이냐~~나와 딸래미는 바로 스타벅스로 향했다.
커피와 음료수를 하나씩 시켜놓고 테라스에서 딸래미랑 같이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고 셀카를 찍으면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훅! 정말 행복하다.....는 느낌이 나를 감쌌다. 7년 전 핏덩이 같은 이 아이를 안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도대체 언제쯤이나 대자로 뻗어서 통잠 한 번 자볼 수 있을까, 얘는 왜이렇게 울어제끼는걸까 등 오만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정말이지 언제 그랬냐는듯 내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나 꺄르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존재. 맨날 공주치마만 고집하던 꼬맹이가 자기는 한국나이로 8살이니까 곧 십대라면서 레깅스와 포니테일, 하이탑 컨버스로 코디해야 한다는 이 언니가 평생 나랑 함께라는 사실이 그토록 행복할 수가 없다. 첫째가 이렇게 커버리는걸 알게 되니 4살 꼬맹이 둘째는 뭘 해도 그저 예쁘고 이 흘러가는 시간이 자꾸만 아쉬워서 괜시리 볼을 더 쎄게 꼬집어댄다 ㅋㅋ
꽤나 괜찮은 삶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 오기 전 나는 너무너무너무너무 바쁜 일상을 살아냈지만 내 자신이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11년째 같은, 이제는 친정같은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글을 쓰고 방송하는 기자이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있는 엄마이기도 한 게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를 지배하고 있던 '꽤나 괜찮은'이란 수식어는 내 스스로가 판단한 게 아닌 남들의 평가일 뿐이었다.
사실은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내 직업과 육아는 공존할 수 없었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가정이 아닌 일에 매달려 있는 우리네 직장인의 삶 속에서 아이들은 늘 엄마가 고팠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사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난생 처음 유학을 앞두고 나와는 다른 이유로 예민해져있던 남편과도 허구언날 부딪혔다. 미국 오기 직전 방광염으로 혈뇨를 쏟으면서 비행기를 탔던 나였다.
휴직 후 미국생활을 시작한 지 1년 4개월. 수많은 변화 중 반박할 수 없는 팩트 한가지는 나도, 아이들도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선 한달에도 몇번씩 소아과에 드나들면서 항생제를 먹던 아이들이, 비타민 링거 정도 맞아줘야 살아낼 수 있던 내가 말이다.
왜일까. 왜지?? 수없지 생각했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 덕인까? 코로나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운이 좋아서? 뭐 이러든 저러든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할 따름이지만 내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바로 '심신의 안정'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보육과 교육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이 한국보다 좀 더 많은 이 곳에서(도시락도 싸줘야하고, 라이드는 보통 부모 몫이다. 학원차량 따위 없다...) 아이들은 세상 최고의 빽인 울엄마가! 딱! 내 뒤에서 날 지켜주고 있다는 그 든든함을 매일같이 느낀다. 엄마가 있는데 그 무엇이 두려울까. 특히 미국에 오기 직전 난생 처음으로 분리불안을 겪으면서 때아닌 엄마를 그렇게 찾아대던 큰 아이의 불안하던 눈빛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육아서를 보면 엄마와의 시간 절대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데 이를 위해서라도 잠시 쉬어감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를 보면 육아휴직을 어떻게든지 쪼개서 아이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연령대에 쓰기를 추천한다.
나 역시 바쁜 일상을 조금 내려놓고 아이들과 온전히 눈 맞추면서 뒹굴 수 있는 데 따른 안정감이 그토록 자주 앓던 방광염 한 번 안걸리게 한 특효약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일이 곧 나요, 내가 곧 일이라는 나도 모르게 박혀있던 원칙이자 굴레에서 좀 더 자유해졌다고 해야할까. 가족들과 함께하는데서 오는 충만감과 자연이 주는 평온함, 멍때리는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 속에서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 생각해본다.
일이냐, 가정이냐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리더들을 인터뷰할 때 빠지지 않는 질문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우선순위를 뭘로 두셨나요?"였다. 대개는 친정엄마나 시엄마의 희생을 수반했고 열에 아홉은 "바쁜 엄마와 아내를 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을 서포트해주고 아이들을 양육한 말그대로 현모양처가 있는 남성 CEO들과는 달리 일과 가정을 양 손에 쥐고 고군분투했을 여성 CEO들에겐 당연한 대답이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국회의원인 양향자 당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은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놨다. 삼성전자 최초 고졸 출신 여성임원으로 입지전적인, 한마디로 독하디 독한 캐릭터였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을텐데도 이 아줌마는 인터뷰 내내 단 한번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가족은 무조건 0순위다.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그 시간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임팩트 있는 기억을 남겨줄지 고민하라"고 했다.
예를 들면 이 아줌마는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운동회 중 '엄마 달리기' 종목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했다고 한다. 하루 웬종일 회의를 하다가도 엄마 달리기 시간에는 구두를 내던지고 미친듯이 뛰었고 손등에 찍힌 1등 도장을 흔들면서 다시 회사로 갔단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라고 자랑스럼게 이야기하는 그 순간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새로웠다. 일과 가정은 무게중심을 선택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명하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그게 워킹맘과 대디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아이들과 있으면 행복한 다인이, 수현이 엄마도 나고 글쓰고 말하는게 좋은 송기자도 나다. 이 둘을 서로에게 임팩트 있게 끌고 나가는 거 그게 바로 우리가 고민해야할 주제다. 일이냐, 가정이냐는 이제 갖다 버려야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