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가 된 소녀는 서쪽 하늘의 달을 향해 걷고 또 걷다 어느덧 서쪽 나라의 수도에 닿았어요. 서쪽 나라 사람들이 '달의 마녀가 공주를 납치했다'는 둥 '동쪽 왕이 저주의 대가로 자기 공주를 제물로 바쳤다'는 둥 수군거리는데 벙어리 소녀는 소문을 뚫으며 말없이 길을 재촉했어요.
하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달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똑같은 크기와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어요. 숲 속 풀밭에 가만히 누워 귀뚜라미 밤의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던 소녀는 문득 자신이 잘못된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닌가 고민에 빠졌어요. 그때,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듯 달을 향해 길게 휘어지던 별똥별 하나가 달에 닿지 못하고 호선을 그리며 그녀를 향해 떨어졌습니다.
콰콰쾅-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숲 속에 무언가 떨어졌어요. 소녀는 깜짝 놀라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보니 웬 거대한 새와 기사가 심한 부상을 당한 채 쓰러져 있었답니다. 소녀는 거대한 새와 기사를 치료하기 시작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날 깨어난 서쪽 왕국 기사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글씨를 써 왜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물어보았어요.
"이 새를 타고 달에 가려다 떨어졌습니다."
"왜 달나라로 가려했나요?"
"달의 마녀에게 납치당한 동쪽 나라 공주를 구하러..."
부끄러워하는 기사를 보며 공주는 또 물었어요.
"공주를 본 적이 있나요?"
"네 초상화로 보았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코앞의 공주는 알아보지 못하고 초상화에 빠진 기사를 보며 소녀는 쓴웃음을 지었어요.
"이 새를 타고 날아가면 달에 닿을 수 있나요?"
"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제 몸이 무거워서 인지 닿지 못했습니다. 사람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면 가능했을 텐데 말이죠.."
다음 날 밤, 잠이 든 기사를 뒤로 한 채 소녀는 몰래 거대한 새를 타고 달나라로 향했습니다. 거대한 새는 높이 높이 날아올랐어요. 공기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달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소녀의 무게 때문인지 더는 눈 앞에 있는 달에 닿을 수 없었어요. 소녀는 준비해둔 약병을 열어 단숨에 꿀꺽 마셨어요. 다음 순간 소녀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순식간에 달에 올랐습니다.
"누구지?"
달의 마녀가 긴 손가락을 뻗어 소녀의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어요.
"너는 동쪽 모지리의 딸이구나. 여기는 왜 왔지?"
"저, 저는 사람들의 저주를 풀어주려 왔습니다!"
신기하게 그녀에게 목소리가 돌아왔어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본 소녀는 그녀가 다시 예전 공주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답니다.
"저주? 나는 저주를 내린 적 없단다."
공주의 얼굴에서 손을 뗀 마녀는 붉은 꽃을 따서 공주에게 넘겨주었어요.
"나의 꽃가루는 단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게 할 뿐 미움은 들어 있지 않단다."
과연 붉은 꽃의 꽃가루에는 어떤 미움이나 증오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째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거죠?"
"그건,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이 있기 때문이지."
마녀가 공주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였어요.
"즐거움, 슬픔, 사랑, 미움, 그중 '미움'이 가장 가볍고 전염력이 강하지. 하지만 그것이 널리 퍼지는 데에는 네 아비의 역할이 가장 컸다."
마녀는 손을 흔들어 유리 구슬로 지상을 비추었어요. 사람들이 기침할 때마다 아버지와 귀족들이 심어 놓은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려왔지요.
- 다 서쪽 나라 때문이야, 서쪽 나라 탓이야.
그들이 날리는 그 미움의 씨앗은 사람들의 기침을 타고 다시 다른 미움으로 또 다른 미움으로 그렇게 계속 눈덩이처럼 크게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 싫어 싫어! 엄마 미워!
그녀가 마스크를 씌워 주었던 벙어리 부부의 아이도 나타났어요. 이제 제법 말을 하는 아이는 그 작고 귀여운 입을 가린 마스크를 답답하다는 듯 던졌어요. 마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어요.
"마스크가 미움 막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들의 배려가 미움을 막은 것이지.."
유리구슬 속의 벙어리 엄마는 마스크를 주우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스크를 주우며 등을 돌린 엄마의 등 뒤로 아이가 자신을 보라고 칭얼거리고 있었습니다.
- 엄마 미워 엄마 미워 나 보라고
미운 말을 하는 아이의 입을 바라보며 공주는 눈물을 흘렸어요.
"미운 말을 한다고 그 마음이 모두 미움일까요? 단지 아이가 엄마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그걸 깨우쳐주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입은 온통 미움과 증오가 점령하여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단다. 어찌할 것이냐? 모든 이들을 벙어리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이 일의 원흉인 너의 아비와 서쪽 나라 여왕을 죽일 것이냐?"
마녀의 비웃음에 공주는 눈을 꼭 감고 생각에 잠겼어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공주는 눈을 떠 마녀에게 말했어요.
"입으로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의 눈물로 저 아이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세요."
마녀는 하얀 꽃을 따서 공주의 눈에 가득 담긴 눈물과 함께 꽃가루를 지상에 날렸어요. 지상에 나풀나풀 퍼지던 꽃가루가 눈에 닿자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던 아이는 눈에 간지러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어요.
- 엄마,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엄마는 그제야 뒤를 돌아 아이를 보았고 벙어리 부부와 아이는 서로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입으로는 미움을 말하며 싸우다 눈물로 사랑을 말하며 서로 화해하기 시작했어요. 미움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랑과 화해의 눈물로 조금씩 미움이 정화되고 있었답니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뜬 기사는 새 위에 잠든 듯이 죽은 소녀를 발견했어요. 독이 든 약병을 손에 꼭 쥔 채 고요하게 눈을 감은 얼굴을 보며 기사는 소녀가 바로 그가 찾던 공주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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